◇◆◇
― CODE Ianes. ALLOW ACCESS. ENTER. DOOR CLOSED. SYSTEM LOCKED.
― 환영합니다. 편안한 휴식 되시길 바랍니다.
2809. 11. 13. 목요일, 날씨 맑음.
아아, 오늘의 기록입니다.
이건 노앤드로 보내는 일지에 포함되지 않도록 꼭 신경쓰시길 바랍니다, 이아네스.
히어로와 모종의 접근이 있었던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약점을 붙들고서는 바로 무언가 불합리한 일이라도 시킬 줄 알았던 이는 언제 그런 협박이 있었는지 싶을 만큼 아무렇지 않게 저를 대했고, 오히려 평소보다도 더 친근한 척 굴었습니다. 대신 그에게 더 이상의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내내 긴장하고 있었더니 매일매일 속이 쓰려 그나마 점심 시간에 식사 대용으로 마시곤 했던 과일 주스마저도 거르게 되었는데 이거야말로 히어로가 저를 말려 죽이려는 심산인 거겠죠…. 본인은 그럴 생각 없다며 왜 식사를 거르냐고 자꾸 같이 먹자 찾아오시는데 솔직히 불편해요, 금방이라도 약점을 쥐고 흔들 것처럼 굴어놓고 왜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지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그의 지난 워프에 뭔가 특별한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요, 아니면 제 피가 말라 죽는 꼴을 기어코 보고 말아야 한다는 걸까요. 그 속내를 알 수만 있다면 머리를 열어보고 싶, …아니, 아니지.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고, 잠들어 있을 때 몰래 꿈에 들어가서 물어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저한테 왜 그래요? 저는 그냥 조용히, 노앤드에서 시킨 일만 하면서, 그러니까 크게 실험에 누가 되는 일은 하지 않을 테니까, 완성되지 않도록 조금씩만 조정하며 모든 실험 결과가 현재의 상태에 고착되어 있을 수 있도록만 할 생각인데, 소, 솔직히 이 정도는 해도 되지 않나 싶었는데…
이후로 한참이나 한탄이 이어진다. 미워요, 그냥 모른 체 해 주면 되잖아요. 어릴 때의 저와 지금의 제가 닮으면 얼마나 닮았다고 그래요… 그리고 잠깐의 조정.
…여하간, 이런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연구소에서의 일은 크게 어려운 점이 없습니다. 대부분은 친절하시고, 몇몇은 연구에 진척이 없어 신경질을 내곤 하지만 과거에서 가져 온 것들을 연구하는 일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고 제법 흥미롭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지금과 달리 자연에서 볕과 물을 듬뿍 받고 자연 그대로 자라난 식물들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생장에 꼭 필요한 요소 중 일부가 부족하더라도 그것들은 쉬이 죽지 않고 뿌리와 가지를 뻗어내어 악착스레 삶을 이어갔던 듯 합니다. 최근 연구소의 중점은 사막과 같은 극한 환경에서도 죽지 않고 자라는 선인장이나 유포르비아 등의 식물의 유전 정보를 타 식물에 접하여 작금의 환경에서도 성장시킬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 일전처럼 단순히 접목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유전 정보 자체를 변이시키는 게 목적입니다. 벌이나 나비 등의 매개가 없어도 스스로 생식할 수 있는 새로운 종 말입니다. 물론 기존 식물들의 특징은 고스란히 가지고 있어야겠지요. 맹독을 가진 옥수수 같은 게 만들어지면 곤란할 테니까…. 이 모든 과정은 굉장히 흥미로워요, 아직 말단 연구원이라 제 손에 떨어지는 건 별로 없지만 말입니다.
물론 맡은 바 소임도 다하고 있어요. 좋은 결과를 보이는 식물들은 빼돌리거나 유기물의 배합량을 바꾸어 실패한 것처럼 보이도록 바꾸기도 합니다. 이런 실험이 성공해버리면 노앤드의 교리에 반하게 되니까요. 모든 고통은… 종래에 행복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고난임을 알고 있습니다. 고통은 감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은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류의 고통은 결국 인류를 신천지로 이끌어 줄 환희의 찬송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럴진대, 실험에 성공하면 인류는 이 세계를 움직이는 커다란 진리 자체를 부덕하게 만드는 것이지 않겠나요.
가끔 노앤드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저도 이제 임무를 맡을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지난 주에 보낸 편지에 대한 답은 왜 아직 안 왔는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저는 이곳에서도 점차 입지를 늘려가고 있고, 동시에 너무 눈에 띄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히어로만 아니라면, 저를 수상하게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부해도 좋습니다. 왜 아직도 저를 상부에 찌르지 않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저, 적어도 노앤드에 누 가는 일은 없도록 할 예정입니다. 저는 ‘이아네스’니까요. 그 곳과는 아무런 상관 없는.
똑똑,
이아네스. 안에 있어? ‘깊은 수면 모드’가 켜져 있어서 그런데. 혹시 벌써 자는 건가?
어, 어라. 분명 시스템을 락다운 시켰을, 아니… 아, 아니네. 그냥 닫아두기만으아아앗…!
우당탕탕!
와당탕!
쿵!
이아네스, 안 자고 있지. 잠깐 얼굴 좀 보고 싶은데.
어, 아, 잠깐만요…! 이, 일기 쓰고 있었어서…!
그리고 무언가 잔뜩 휩쓰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 문 너머에서 들리는 먹먹한 웃음소리. 문이 부드럽게 열리는 소리와 다시 닫히는 소리. 이내 모든 목소리가 꿈결처럼 멀어진다. 녹음기는 여전히 켜진 상태다. 그리고 이내 삑.
엉망이 되다못해 머리며 옷차림까지 죄 헝클어진 모양새로 방에서 튀어나온 이아네스─곧 세나 아이는 어정쩡한 자세로 자신의 방까지 찾아온 히어로를 올려다보았다. 잘 다듬어진 금발, 사람 좋은 듯 짓고 있는 달콤한 미소, 누가 보면 협박범이 아니라 금방이라도 사랑 고백이라도 할 것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입술이 열리면,
“이상한 거라도 하고 있었나?”
“그, 그럴 리가 없잖아요…! 갑자기 무슨 일, …이세요? 저 이제 막 누워서…”
“산책 좀 하자고.”
“저 진짜 자려고 했는데…”
“전에 했던 얘기, 아직 안 끝난 것 같은데. 그렇지?”
그 때 다 끝내두는 게 나았을까, 아니면 주사는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는 쪽이 더 맞았을까. 세나 아이는 그동안 히어로와 함께 보냈던 한 달을 떠올리며 눈을 찔끔 감았다가 뜬다. 본인의 ‘일기’에는 마치 임무에 성실히 임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으나 최근 한 달 동안은 거의 히어로─이사야 유르겐 에르하르트의 전담 연구원 노릇을 하기도 바빴다. 연구소에 들리자마자 자신을 찾는 히어로 때문에 모든 시선을 받느라 몰래 빼돌릴 결과물도 깜빡하고 두고 나오질 않나, 타임 트래블을 마친 직후 얌전히 휴식이나 취하러 갈 것이지 냅다 와서는 실험 도입 전 거쳐야 하는 자잘한 검사를 다 마친 이번 수집물이라며 반드시 이아네스,─그는 분명 여기서 강조했다─가 연구를 진행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해놓고 휭하니 떠나버리질 않나, 배합 비율을 달리 하여 실패작을 만들어내려던 찰나에 지금 뭐 하는지 물어봐도 돼? 하며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 모든 기기를 다 엎어버릴 뻔 하지 않나… 물론 이건 히어로 덕분에 대형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으니 이거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가 따로 없다. 그것 외에도 이 연구소의 숙소동에서 지내고 있는 세나 아이를 어떻게 매번 찾아내는지 매 식사 시간마다 찰떡처럼 옆에 붙어있어 딴짓 할 시간 자체를 주지 않고 피를 내내 말렸다. 그러니까, 히어로가 그걸 노렸든 그렇지 않았든 세나 아이에게는 고역의 시간이었다는 뜻으로.
─다만 진짜 고역이었던 이유는 따로 있는데, 그건 바로 이 히어로가 이 기관 내의 아이돌이라는 점! 그리고 그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는데, 뒤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달콤하다거나, 식사를 꼬박꼬박 챙겨주는 태도가 마치 연인 대하듯 상냥하다거나, 누군가가 둘 보고 요새 너무 친하지 않냐고 물어오면 자연스럽다는 듯 어깨를 감싸안고서는 그렇게 보이냐며 웃어보이는 태도라거나. 죄 세나 아이로서는 아무렇지 않게 수용하기 어려운 일들이 대다수였다. 그야 그는 직장, 휴식, 노앤드, 직장, 휴식, 노앤드…만을 알아온 사람이었던 탓에. 여하간, 이런 사소한 사안은 잠시 옆으로 밀어두고 다시 두 사람의 대화로 돌아가자면 다음과 같다.
“오… 오래는 안 돼요. 정말 잠깐이에요.”
“왜, 보고할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나?”
“조, 조용히…! 그리고 이상한 부탁은 안 들어 드릴 거니까, 저도 당신의 약점을 잡고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이거에 대해서는 분명 그 때… 그래, 아마 네가 싫어할 만한 조건은 아닐 테니까.”
거짓말쟁이! 마지막은 말로 꺼내지 않고 샐쭉하게 노려보고 시선 돌리는 것으로 마무리했으나 인공 정원으로 향하는 복도에 히어로의 웃음소리가 한동안 울리고 말았음은 부정할 수 없겠다.
그렇게 정원으로 들어선 두 사람은 곧 으슥한 곳을 찾았다. 격정적인 로맨스나 밀회 따위를 목적으로 함이 아니었음을 알리는 건 이사야의 몇 마디 말 끝에 아이가 내어보낸 반응 덕에 알 수 있었으리라.
“네?”
“내가 알아온 모든 정보가 담긴 수첩이라니까. 안 받을 거야?”
“이, 이걸 왜 저한테…”
이사야는 다시 웃어보였다. 그러나 이어진 문장은 그 표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아이는 아주 얼빠진 낯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내일 죽을 거거든.”
아이의 목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이사야가 주의를 한 번 줬다. 아이는 네?! 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본인 입을 틀어 막았고, 이사야는 여전히 웃기만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야… 그렇게 이어지는 설명은 다음과 같았다.
정부측에서는 프로메테우스 프로젝트의 실패를 예상하고 있다. 곧 선거철이니 이러한 실패는 곧 정권의 교체로 이어질 것이다. 그들에게는 위기가 필요하고, 그래서 전 국민의 히어로인 이사야 에르하르트의 암살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도 그걸 알아 차렸으나 같은 시도는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니 아예 죽은 척을 하려고 한다. 그러니 도움이 필요하다.
“물론 네게 나를 도울 동기가 별로 없음은 알고 있어, 이아네스. 하지만… 내가 이대로 사라지게 되면 네가 ‘세나 아이’임을 알아주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게 될 걸?”
“그래도 별로 상관은…”
“없겠지. 하지만 네 진짜 이름을 찾을 길도, 너를 구속하는 영역에서 벗어날 길도 영영 사라지게 되는 거야.”
이사야는 꼭 어린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혹은 연인을 유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의 이름을 되찾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는 것처럼. 그는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부른다.
“아이.”
“…네.”
“날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는 그 수첩에 쓰여있어 … 네가 원하지 않는 다면 읽지 않고 폐기해도 좋아. 하지만, 난 널 기다릴 거야.”
“…….”
“기대해도 되겠지?”
아이의 어깨에 이사야의 손이 한 번 닿았다. 고개를 숙인 아이가 이사야를 바라볼 때까지, 그는 잠깐의 시간을 기다렸다. 비로소 어둠이 내려 어둑한 정원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를 마지막으로 이사야는 훌쩍 떠나 모습을 감췄다.
다음 날 아침, 그가 예고했던 것처럼 온 세상이 시끄러웠다. 히어로 이사야 에르하르트의 죽음! 공중에서 그가 탑승한 비행선이 폭발하였다는 이야기가 어디서든 화제였다. 뉴스에서는 연일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노력중이라는 문장이 흘러나왔고, 며칠 내에 기기 결함이 원인이 아닌 이사야 에르하르트의 기기 조작 미숙이 그 폭발 사고의 원인이라는 이야기까지 보도되었다. 사람들은 프로메테우스가 죽었다고 떠들었고, 그들에게 돌아올 불씨 따위는 없는 것처럼 굴었다. 곳곳에서 혼란과 동요가 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