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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은 녹스에게 매달려 삼 십여 분 동안 핑계 아닌 핑계를 대고서 풀려날 수 있었다. 다만 그가 몰랐던 것은 녹스는 아론의 가출에 간섭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단 것이며, 가출을 시도했다 하더라도 지구에 떨어져 녹스에게 신세를 지게 된 것은 불가항력이었으니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단 거였지만. 녹스가 입 밖으로 옮기지 않으니, 아론은 알 수 없다.

 

“내가 전에 말한 적 있지? 지구는 엄청나게 낙후된 곳이라고. 우주 연합에도 가입하지 않고 타 행성 거주인의 유무조차 파악하지 못한 아주 낙후된 곳.”

“전에 말한 적 있어요. 당신의 별에서는 천 년도 더 전에 이 정도의 문명을 이룩했다고 했었죠.”

“그래서인지… 우리 별은 좀 따분하달까. 재미가 없어. 온갖 것들을 기계나 AI가 대체해 줘서. 그런데 우리 할머니는 좀 엄격하신 편이거든…. 재미가 없는 것들을 계속하라고 하시니까… …홧김에?”

“홧김에 가출을 해서 이 머나먼 지구별에 떨어진 거고요?”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맞긴 하지만.”

 

아론의 낯이 민망함으로 물든다. 붉어지는 귀를 식히려 뒤로 젖혔던 귀를 바로 하고 손부채질을 연신 해댔다. 작게 웃던 녹스가 조용해진 것을 뒤늦게 눈치챈 아론이 그를 바라본다. 녹스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호기심이 어린 눈을 한 채로 몸을 조금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론, 당신… …정말 외계인이었군요.”

“새삼스럽게 왜…?”

“당신 귀가 길잖아요.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데.”

“으응? 아, 아아. 맞아. 지구인은 이렇지 않지. 그래서 나름 열심히 가리고 있었는데.”

“과연…. 이런 귀를 보면 다른 지구인들은 당신이 외계인인 걸 단번에 눈치챌 거예요.”

 

녹스가 고개를 기울여 아론의 귀를 가까이서 살핀다. 둥그런 형태를 가진 지구인과는 달리 끝이 뾰족하고 길다. 굳이 비교하자면 이야기 속 엘프의 귀가 이런 형태일 테다. 외계에서 찾아온 이 백발의 외계인은 지구인과 거의 흡사하게 생겼으나 종종 지구인과의 차이를 보인다. 새하얀 머리카락이나 새하얀 눈도 그렇고, 귀도 그렇고…. 아예 외관이 다르면 모를까 비슷하면서도 다른 모습이 묘한 거리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녹스는… 순진한 외계인의 착한 지구인 친구 녹스 스카테이아는… 그런 모습들이 차라리 지구인들보다 더 친근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아무튼… 매일매일 통신 장치를 고쳐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니까…. 그것만 고치면 집에서 나를 데리러 오는 건 금방일 거야. 그때가 되면 너한테 신세 진 것도 최대한 갚을 테니까 안심하라구….”

그래서 저 외계인이 지구를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괜찮아요. 당신이 되는 만큼 머물다 가도 좋아요.”

“정말? 넌 정말 최고의 지구인 친구야! 내가 처음 만난 지구인이 너라서 다행이지.”

 

아론이 손을 뻗어 그를 덥석 끌어안는다. 아론을 밀어내려던 녹스의 손이 허공에서 배회하다 그의 등을 가볍게 두드린다. 난처했던 것도 처음에나 그랬지, 3주쯤 지나면 적응한다. 다만 아무 지구인에게나 이러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맹한 눈을 가진 외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썩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론, 당신이 여기 처음 왔을 때 말이에요. 저 말고는 아무도 당신의 비행선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데 어떻게 된 건가요?”

“응? 아, 그거?”

 

되물으며 아론이 녹스의 품에서 떨어져 나간다. 한순간에 비어버린 품이 어쩐지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파에 걸터앉으며 아론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기울이는 것도 잠깐이다.

 

“친절한 외계인 시스템이라고 해야 하나…. 으응, 통역이 어떻게 나갈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런 거야.”

“네, 전혀 모르겠네요. 아론, 지금도 통역기에 의존하고 있나요? 지구의 언어를 연습하라고 했는데 그건 잘하고 있고요?”

“…나 여기 온 지 3주밖에 안 됐거든? 벌써 한 행성의 언어를 습득했을 리가 없잖아. 아무튼, 말 돌리지 말고.”

날카롭게 선 외계인의 눈총이 녹스에게 닿는다. 그는 작게 삐져나오는 웃음기를 꾹 누르며 답했다.

“네에. 그래서요?”

“본선으로 왔으면 지구인들에게 꽤 이목을 끌었을 텐데… 알다시피 내 본선은 우주 어딘가에 떠돌고 있을 거란 말이야. 내가 타고 온 구조선은 달라. 탑승자의 구조를 최우선으로 하게 설정되어 있단 말이지. 더럽게 좁긴 하지만. 거기에는 생존에 필수적인 모든 요소가 들어 있는데… 생각해 봐. 만약 불시착한 곳이 탑승자가 지낼 수 없는 환경이면 어떨 것 같아? 내렸는데 탑승자가 숨 쉴 수 없는 환경이거나, 대지가 없는 환경이라거나 하면 어때?”

“죽겠죠.”

“그래, 그럼 구조선의 의미가 없잖아. 그러니까 구조선은 최대한 탑승자의 안전을 우선할 필요가 있어. 불시착, 혹은 떠도는 우주가 안전하지 못한 환경이라고 여겨진다면 구조선의 문은 열리지 않아. 또, 바깥에 위험한 생명체가 있다면 열리지 않아. 그리고 최대한 신속하게 주변에 구조 신호를 보내게 설정되어 있어. 우주 연합에 가입한 행성 거주인들은 구조 신호를 받으면 직접 구조하거나 구조할 수 있는 연합에 신고해 주는 것이 원칙이거든. 그런데 말했다시피 지금 내 구조선의 통신 장치는 고장이 나서 그게 불가능해. 대신 그다음 설정값에 따라 다른 구조 신호를 보내는 거지. 그게 네가 내가 처음 왔을 때 본 빛이야. 빛은 생명체가 가장 인식하기 쉬운 시각 체계니까. 언어가 다르더라도 빛이 나는 물체가 있다면 접근하겠지? 물론, 위협을 느낀다면 접근하지 않겠지만…. 자, 여기서 문제. ‘구조 신호’를 보고 접근하는 생명체가 탑승자에게 위협이 된다면 어떨 것 같아?”

“문을 열어주지 않거나… 다른 조치를 하겠죠.”

“똑똑하네, 정답이야! 이 구조선은 최첨단 과학 기술이 담겨 있어. 내 행성의 인공지능의 발전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놀랍다구. 애초에 위협이 되는 생명체에게 그 빛과 구조선 자체를 보여주지 않아. 가시권 범위 벗어나기를 택한다고. 너, 내가 너를 너무 무턱대고 믿는다고 생각한 적 없어?”

“…있죠. 저렇게 경계심 없이 살다가 틀림없이 뒤통수를 맞을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으응, 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당신이 외계 행성에서 너무 넋 놓고 다닌다곤 생각 안 해봤고요?”

“너 정말 말 한마디로도 안 지려고 하는구나. …쳇.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아무튼 내 구조선의 구조 신호를 보고 접근한 첫 생명체만큼은 탑승자에게 위해를 끼칠 인물은 아니라는 소리야. 그 뒤에 오는 생명체는 모르겠지만… 넌 내 구조선에 접근한 첫 번째 생명체지. 알겠어?”

“대충 이해했어요. …하지만 아론, 당신은… 구조선의 인공지능만 믿는 건 그렇게 좋지 않은 생각이란 건 안 해봤나요.”

“으응? 예를 들자면?”

“위해를 끼친다는 범위가 너무 모호하잖아요. 내가 구조선을 봤을 당시에는 당신에게 위해를 끼칠 마음이 없었지만, 지나고 나서는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는데.”

“나한테 위해를 끼칠 거야, 녹스 스카테이아?”

“그럴 마음은 없어요.”

“그럼 됐지, 뭐.”

그러니까 그런 안일한 마음이 문제가 된다는 건데. 녹스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문장을 눌러 담았다. 그를 바라보는 외계인의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이 싫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 만난 주제에 이상하리만치 녹스에게 신뢰를 가득 담긴 눈빛을 보냈지. 20년 넘게 산 지구의 인간들보다 처음 만난 외계의 인간이 그에게 더 큰 신뢰와 애정을 보낸 것이다. 그것이 구조선의 구조 신호 체계 때문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가도, 아론이 녹스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그리 했는가? 무엇을 보고 처음 보는 외계 행성의 인간에게 지낼 곳을 요청하고, 이렇게 무방비하게 다가오는지.

“…그래도 역시 당신은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걱정도 많다…. 음, 근데 착한 지구인인 네가 모르는 게 있어. 난 지구인보다 힘이 세. 무술도 배웠어.”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녹스의 눈에는 마치 아이가 본인이 어른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였다. 보기에는 근육도 얼마 없어 힘을 쓴다 해도 상대가 제압될지 의문…. …고민하던 녹스는, 문득 아론이 온 후 집의 물건들이 망가지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이 생각났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아까도 욕실에서 무언가 잔뜩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손을 뻗어 아론의 손을 꾹꾹 눌렀다.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이다. 무술을 익혔다는 것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다. 녹스가 그를 눈치챈 것 같자 아론이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이 맞지?”

“…그래도 조심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예요. 지구의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당신은 잘 몰라요.”

“그래도 우리 별 사람보다 위험하겠어? 다들 영 비실비실해선…. …아, 알았어, 알았다구. 조심할게. 근데 착한 지구인 친구, 녹스 스카테이아야.”

“네, 아론. 왜 그러나요?”

“나…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는데.”

“어딘데요?”

“같이 가준다고 약속하면 말해줄게.”

“어딘지 말하면 생각해 볼게요.”

“그러지 말고오오….”

“어딜 가고 싶어서 그러는 건가요, 아론.”

단호한 물음에 아론의 눈썹이 아래로 기울었다. 이내 녹스가 빌려준 태블릿을 가져와 화면을 몇 번 터치했다. 처음 빌려줬을 때는 박물관에서나 봤다며 구닥다리라고 투덜거렸던 아론이지만, 최근에는 태블릿으로 OTT 서비스나 포털 서비스를 들락날락하기에 바빴다. 그러면서 드라마나 영화, 포털 사이트에 나오는 지구의 문화에 관심이 생기면 태블릿을 들고 녹스 옆에 붙어 본인도 체험하고 싶다고 졸랐다. 이번에도 비슷한 패턴이었는지라, 어지간한 것은 허락해 주겠다는 마음을 가진 녹스에게 아론이 보여준 것은 놀이공원 사이트다.

“여길… 가고 싶다고요.”

아론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이것저것 많이 알아봤는지 입장료를 할인받는 방법까지 아주 야무지게 늘어놓았다. 두 눈이 반짝거리는 것이 완전히 꽂힌 게 분명하다.

“드라마에서 봤는데 엄청 재밌어 보이더라! 나 여기 가고 싶어, 응?”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요.”

“나 이제 제법 지구인 연기 잘할 수 있게 됐어!”

“당신, 지금 귀가 움직이는데….”

“……. 이제 괜찮지?”

“당신의 고향별은 지구보다 훨씬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있다면서요. 당신에겐 이런 놀이공원의 놀이기구는 그다지 재밌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여기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단 말이야. 놀이기구도 타고, 맛있는 것도 먹고! 응? 가자아아. 녹스, 가자아아아.”

 

간절한 시선이 녹스를 찔러댄다. 놀이공원을 대관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럼 놀이공원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는 아론이 크게 실망할 테다. 그렇다면 사람이 바글거리는 놀이공원을 그냥 가는 수밖에 없다는 소리인데. …저 사고뭉치 외계인이 외계인임을 안 들키고 하루를 무사히 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럼 저랑 약속 하나 해요.”

“얼마든지! 뭔데?”

“제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낯선 사람이 말 걸어도 무시하고, 외계인인 건 절대 들키지 말아요.”

“…하나가 아닌데?”

“그래서, 안 할 건가요?”

“아니!! 해!”

“그리고… 당신 우주선이 얼마나 고쳐졌는지도 보여줘요.”

“…그건 왜?”

“매일 가서 고치고 오는 것 같긴 한데, 영 믿음직스럽지 못해서요.”

“…열심히 고치고 있거든?!”

“아론… 얼마 전에 제 서랍장을 고친다고 했다가, 더 망가뜨린 건 기억 안 나나요.”

녹스의 말에 아론이 시선을 피한다. 고개까지 돌리고서 휘파람을 불었다. 모르쇠 전략이다. 그렇게 해도 녹스의 시선은 떨어지지 않는다. 눈치를 살피던 아론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네, 그럼 내일 같이 보러 가죠.”

“…내일?”

“네, 내일.”

“…그럼 놀이공원은 언제 갈 건데?”

“글쎄요…. 당신 우주선을 확인하고… 이번 주 주말에 어떤가요.”

녹스의 말에 우중충했던 아론의 낯이 단번에 밝아진다. 달력을 보며 요일을 가늠하던 아론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것 하나 쥐여줬다고 반응이 저런 것을 보면 애는 애다. 녹스는 옅게 웃으며 보고 있던 태블릿을 아론에게 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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