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각 6월 23일 14시 40분, 섭씨 28도. 습도 64%, 초속 3m의 남서풍이 불고 있다. 기압은 997.6 hpa, 가시거리는 31.9km이다.
아니, 이 정보는 현재 주혜령의 처지를 나타내지 못한다. 이 정보는 단지 계기판에 뜬 숫자이며, 주혜령이 위치한 공간의 정보에 해당하지 않는다. 계기판의 정보가 그려내는 그곳은 주혜령이 그리워하는 곳, 그가 두고 온 푸른 행성 속 고향이다.
주혜령은 상상한다. 여름의 초입, 강한 자외선을 맞는 수풀들을 창문 너머로 감상하는 자신을. 서늘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지하철의 3번째 칸, 가운데 긴 좌석의 끝, 세번째에 해당하는 문 바로 오른쪽 좌석에 앉아 있는 자신을. 본인이 3-3출구 근처에 앉아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빠른 하차를 위해서였다…
그래.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었는데 집에 두고 온 걸 챙기느라 빠듯하게 출발했을 것이다. 이내 상상속의 자신은 이내 5분 정도 늦게 연착된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뛰어올라간다. 늘 그렇듯 이번에도 연착된 지하철 탓을 하며. 숨을 몰아쉬며 개찰구를 넘어서자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천천히 기대었던 벽에서 등을 떼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사람은….
누구지?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얼굴이 있었던가?
뭔가 맨들맨들 동글동글한... 그래.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이 우주복의 헬멧부분같은...
퍼뜩 정신이 든다.
방금까지의 상상이 터무니 없다는 듯 이곳은 침묵의 세계. 자신의 숨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좁은 공간이다.
간간히 파직거리며 빛이 번뜩이지만 그 오류적 사건 사이를 채우는 것은 아득한 공허. 그 무엇도 없는 어둠이다.
주혜령은 온전하지 않은 우주선에 혼자 남겨졌다.
너무 울어서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눈물이 또 한 번 차오른다. 이 상태에서는 눈물을 닦을 수도 없으니 눈을 꾹 감고 참아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꺼풀 사이를 삐져나온 물방울은 헬멧 안에서 잠시 유영했다.
순간 주혜령은 자신의 수분손실이 걱정되었지만 이내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어떻게 죽든 똑같다며 체념했다.
차라리 자다가 의식이 없을 때 죽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든 주혜령은 눈을 감았다.
-
“블루 사파이어랑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 하나 주세요.”
익숙하게 칵테일을 주문한 주혜령은 두 손에 잔 하나씩을 들고 필라가 기다리는 테이블로 갔다. 필라는 음료에 시선도 주지 않고 주혜령만 바라보았다. 주혜령은 블루 사파이어를 필라 앞에, 롱 아일랜드 아이스티를 자기 앞에 놓았다. 물론 필라는 섭식을 하지 못했지만, 주위 시선을 의식하기도 했고 1인 1메뉴 필수인 칵테일바라 음료 두 잔을 시켰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도 주혜령은 두 잔을 주문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필라랑 같이 바에 간 날에, 주혜령은 필라 몫의 음료까지 전부 마셨고 그때부터 알게모르게 둘 사이에 이런 관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떠들며 금새 한 잔을 끝낸 주혜령은 필라 몫의 새파란 음료로 손을 뻗었다.
“륭며, 너무 빨리 마시는 거 아냐? 얼굴이 빨개.”
“헤헤.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요! 괜찮아요~. 집에 잘 돌아갈 수 있어요. 필라 씨가 바래다줄 거잖아요?”
필라가 말리기도 전에 주혜령이 먼저 푸른 액체가 담긴 잔과 빈 잔의 위치를 바꿔버렸다.
“아니면 오늘 필라 씨 집에서 자도 되구요.”
양 볼이 달아오른 주혜령은 얼굴색과 다르게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요즘은 자주 놀러가니까 괜찮겠지.
“륭며, 그거 플러팅이야?”
한쪽 턱을 괸 필라는 주혜령의 빠르게 줄어드는 술잔과 함께 주혜령을 쳐다봤다. 아마도 필라의 시선이 느껴졌다.
“예? 아니, 어… 그렇다기보다는… 어… 그런가?”
말을 흐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주혜령을 본 필라는 주혜령의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공구키링이 달린 열쇠를 손에 올려두었다.
“있잖아, 륭며. 같이 사는 건 어때?”
-
이상한 꿈들은 언제부터인가 계속 등장했다.
생소한 음료수를 마시기도 했으며, 폭신한 솜사탕을 한 입 머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날은 별이 가득히 박힌 바닷가이기도 했고, 어느 날은 비눗방울이 날아다니는 놀이터 위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많은 날들은 생소하지만 단란한 집이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항상 단편적인 배경만 기억이 났다. 그렇지만 항상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느낌인데...
누구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연결되어 있지 않은, 저 멀리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어딘가의 마음 속 한켠이 아려오는 느낌이 든다. 왜 항상 깨어나면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들지. 주혜령은 이 느낌이 슬프면서도 그리워 항상 의아해하며 매일 밤을 기다렸다. 마치 꿈을 통해 여행하는 기분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온기 없는 기계들에 둘러싸인 일상을 보낼 때면 특히.
-
오늘은 우주에 나온 지 8개월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다. 눈을 뜨자마자 패널에 적힌 빨간색 숫자가 날 맞이했다. 지구 시각 UTC 2074년 6월 7일. 18시 8분. 나는 깨어난 지 얼마 안 되어 멍한 채로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이다가, 이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왜 깼지? 아니, 노바는 왜 지금 나를 깨웠지?
"노바."
[네, 당신의 -치지직- 노바-치직-입니다.]
원래 ‘당신의 우주 탐험을 책임지는 인공지능 노바 3E.791입니다’, 라는 음성 아니었나?
"왜 지금 깨웠나요?"
[주 박사님의 동면은 19008시간, 약 2년 4개월동안 유지될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여 예정보다 이르게 -치지직-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 나는 다급히 우주선 현황 패널을 열었다.
산소 및 이산화탄소 농도, 정상. 온도 및 생명유지장치, 정상. 동력, 작동 중. 궤도, 이탈.
…잠깐, 뭐? 궤도 이탈?
그러고 보니 우주선의 생김새가 이상하다. 원래 이렇지 않았는데. 꼭 한 부분만 떼어진 것 마냥……
“노바. 패널이 이상한데요. 1번 승무원 동면장치실이 어디 갔죠? 그리고… 이 함선은 목적지 부근까지는 뉴턴 우주정거장과 함께 이동할 예정이었잖아요? 그게 왜 표시 되지 않는 거죠? 이건 마치 우리 우주선만 달랑 떨어져 있는…”
[그렇습니다. 박사님. 약 18시간 24분 전, 우주 정거장 뉴턴은 미확인 소행성에 충돌-치지직-했습니다. 다행히 지금 이 Kopernik-M-3 우주선은 우주 정거장이 소행성이 충돌하기 직전 언도킹,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전해진 로그에 따르면 다른 우주선들은 탈출 시도를 기점으로 모두 통신이 끊겼습니다. 언도킹 이후 부서진 우주정거장의 잔해와의 충돌이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 추정됩니다.]
그러고 보니 우주 정거장의 중력유지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 뉴턴 우주 정거장과 연결되어 있을 때와 다르게 이곳은 지금 무중력. 머리카락도, 깨어나자마자 챙긴 안경도 허공에 떠오른다. 머릿속도 무중력이 되어버린 것 같다. 도망가려했던 안경을 붙잡아 다시 끼며 노바가 주는 정보에 집중했다.
[탈출 도중 우주선의 -치지직-에 위치했던 1번 승무원 동면장치실이 잔해에 충돌해 외피에 손상을 입었습니다. 위기 상황 대응 알고리즘에 따라, 그 즉시 연결부를 잠그고 1번 동면장치실 또한 언도킹했습니다.]
이거 꿈이지? 와, 정말 살벌한 꿈이네. 동면하면 악몽을 꾼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봐.
내 표정이 안 좋아 보이자 – 물론 노바는 심박수를 비롯한 내 생체정보로 내 상태가 안 좋음을 판단했을 것이다 – 노바가 덧붙였다.
[제1 승무원 분들은 동면 상태였으니 편히 -치지직- 가셨을 겁니다.]
이걸 위로라고 하는건가? 이래서 인공지능들은.
제1 승무원들은 실질적으로 이 우주선의 운항을 결정하는 결정권자이며 엔지니어들이다. 통신 엔지니어, 조종사, 수리 엔지니어들. 반면 제2 승무원인 나는 우주생물학자다. 우주를 연구하기 위해 우주로 쏘아올려진 학자 및 연구자들 중 한 명. 내 생명줄을 담당하시던 제1 승무원분들이 통째로 날아가셨다니. 우주비행훈련 때 보았던 익숙한 얼굴들이 뇌리를 스쳐간다. 애도의 슬픈 감정과 함께 지금 나의 상황에 대한 공포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 저기 보이는 수많은 계기판의 버튼을 이해하고 적시에 누르는 능력은 내게 없다. 우주선의 계기판을 만지작거리고 조종하는 건 훈련할 때 겉핥기로만 배웠단 말이다. …집에는 어떻게 돌아가지?
“…통신 기능은 멀쩡한가요? 지구와, 아니, 다른 우주선에게라도 이 사태를 알릴 수는 없나요?”
노바는 늘 그렇듯 스피커로 아나운서 같은 발음의 음성을 출력했다.
[통신 기능은 현재 작동하지 않습니다. -치지직- 선체가 충격을 받았을 때 생긴 오류로 추정됩니다. 전선 합선 및 끊어짐이 원인으로 유력합니다만, 섹터 B-23부분을 고친다면 정상 작동할 확률이 높습니다.]
어디? 뭘 고쳐? 뭐라는 거야. 난 우주생물학자라고.
[백업용 엔지니어 매뉴얼이 있습니다만. -치지직-박사님의 디바이스로 전송할까요?]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기엔 아깝다. 충격받은 정신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도 않았고.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띠링. 한 손으로 들 수 있는 얇은 직사각형 모양 디바이스에 파일이 전송되는 소리가 들렸다.
문득 이 우주선에 잠들어 있을 다른 사람들이 생각났다. 이 조종실은 나 말고도 연구원, 또는 학자로 분류되는 제2 승무원들이 잠들어 있는 공간과 연결되어있다. 물리학자 베라와 화학공학분야-인데 우주 관련된 아주 복잡한 이름의 학위를 가지고 있는-학자 알렉산드로스, 지구식물학자 홍란터우. 그들은 동면상태에서 깨지 않았나? 의문이 떠오르자 타이밍 좋게 노바에게서 음성이 들려왔다.
[주 박사님을 제외한 모든 제2 승무원분들은 탈출 중 충격으로 -치지직- 동면 장치에 사소한 문제가 생겨 해동에 시간이 조금 걸릴 것으로 추정됩니다. 목숨에 지장은 없습니다.]
그 말에 나는 조금 안도했다. 그래도 내가 혼자는 아니구나, 하고. 쌓였던 한숨을 한 번에 내쉬며, 착잡한 마음에 백업용 엔지니어 매뉴얼을 읽어내려갔다. 부디 똑똑한 동료들 중에서 통신 기기를 고칠 수 있는 자가 나오길 빌며 그들이 깨어나길 기다렸다.
-
“필라 씨.”
“륭며.”
그들은 별이 가득 담긴 바닷가에 있었다. 손에는 신발과 양말을 쥐고, 맨발바닥으로 모래를 느끼며 서 있었다. 주혜령의 심박이 빨라졌다. 꼼질거리는 발가락으로 모래알을 느끼며 머뭇거리는 손가락은 느리면서도 착실히 필라를 향했다. 필라를 향한 손가락의 여정은 중간에 그것을 눈치챈 필라의 손에 의해 잡아채졌다. 차가운 감촉. 하지만 차가운만큼 매정한 여타 기계들과는 달랐다. 그들은 서로의 온도에 맞춰지는 감각을 느끼며 바닷가를 산책했다.
“보고싶어요, 필라씨.”
문득 그런 말이 나왔다. 이상했다. 분명 자신들은 지금 마주보며 함께 바닷가를 거닐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필라는 의아한 기색 없이 주혜령의 손을 고쳐쥐었다.
“륭며, 내가 만나러 갈게.”
-
또 그 이상한 꿈이다. 나는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허공을 보았다. 점점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꿈들을 곱씹으며 나는 다시 현실을 직시할 준비를 했다. 깨어난 지 45시간쯤 되었을까. 냉동장치 사이에서 기체가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우주식량튜브를 입에 물고 있다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베라!”
“…혜령? 이게 대체… 우리가 왜 무중력 상태인거죠?”
나는 같은 처지의 물리학자 동료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잠시 혼란스러워하더니 저보다는 빠르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베라. …통신 장비에 대해 아는 것 있어요?”
-
이 우주선은 자전하지 않기에 지구식으로 날을 세진 않지만, 시일이 지남에 따라 한 명씩 무사히 겨울잠에서 깨어났다. 마침내 모두 깨어난 인간 넷은 인공지능 노바의 보조에 맞춰 통신장비와 고군분투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결론은 – 반쯤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 우주선에서 전파를 수신하는 기능까지는 어찌저찌 고쳤지만, 발신이 안 되었다. 희망과 짜증과 기쁨과 분노에 번갈아 가며 담금질된 제2 승무원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기에 불운이 찾아왔다. 발단은 홍란터우의 우주유영이었다. 우주선 내의 전선이 너무 복잡하여 안쪽으로부터 닿을 수 있는 부위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우주선 외벽에서 수리를 해보자는 주장을 꺼낸 홍란터우가 직접 우주복을 입고 나갔던 것인데… 어디선가 날아온 우주쓰레기가 그를 쳤다. 기절한 홍란터우는 계속되는 외침에도 반응이 없었다. 패닉에 빠진 나머지 인간들은 우주복을 챙겨 입고 그를 구하려 했다. 주혜령이 그랬고, 알렉산드로스가 그랬다. 알렉산드로스가 먼저 우주 공간으로 나가 의식을 잃은 홍란터우를 잡고 다시 우주선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뒤따라온 주혜령이 본 광경은 그 둘과 우주선을 잇고 있던 줄이 날카로운 물체에 썰리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마치 사막에 강림한 모래폭풍과 맞먹는 공격성을 가진, 우주을 유영하던 쓰레기 폭풍의 시작이었다. 빨간색 불이 점멸하는 우주선 안에 홀로 남아있던 물리학자는 경고등과 계기판을 보고 급히 우주선을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어찌되었든 여기 가만히 있다간 곧 우주선이 찢길 것이 뻔하고, 그렇게 되면 남은 인간들도 모조리 죽을 판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인공지능의 보좌가 있더라도 첫 비행인 탓에 베라의 운전은 거칠었다. 우주선과 연결된 주혜령은 저 멀리 멀어져가는 두 우주비행사들을 보며 하릴없이 끌려갔다. 생명줄이라기엔 너무도 가는 줄을 잡고서.
갑작스레 닥친 폭풍과 초보운전은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급작스럽게 끝이 났다. 무소음의 세계에서 주혜령이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모든 일이 이미 벌어진 후였다. 주혜령이 우주복에 달린 작은 분사구를 조작하고 끈을 잡아당기며 우주선에 도달했을 때, 그가 본 장면은 참담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파편이 선체에 박혀있었고, 때문에 우주선 안의 생명유지장치가 고장나버렸다. 첫 우주비행을 마친 임시 선장 베라는 본인을 살릴 수 없었다. 짧게나마 전우였던 이들은 모두 떠나버렸다. 주혜령을 어둡고 고요한 우주에 남겨두고서.
우주에 남아있을 수 없던 주혜령은 선체 안으로 들어와 누군가의 통신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우주선 Kopernik-M-3은 기압도 온도도 제대로 유지되지 못한 지붕만 달려 있는 꼴이었으니, 주혜령은 불편한 우주복을 입은 채 우두커니 계기판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러운 사고, 갑작스러운 죽음. 아까는 나오지 않던 눈물이 비로소 제 처지를 자각하고 흐른다. 주혜령은 눈을 감았다.
-
계기판에 뜬 고향의 시간을 보며 그리워하기를 한참. 몇 번을 자다가 깨었는지 모르겠다. 노바도 이제는 잘 응답하지 않는다. 노이즈가 심했다. 우주선은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었다. 관성에 의해서일까. 하지만 왠지 무언가에 이끌려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이 우주선 Kopernik-M-3은 광활한 우주를 나아가다가 거대한 별을 마주쳐 그것을 중심으로 공전하게 될 수도 있다. 그 이름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중력에 매이는 결말이 이 우주 끝까지 날아갈 가능성보다는 높았다…마치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우리 태양계처럼. 작디작지만 생명체라는 우주가 깃들어있는 내 고향, 지구처럼. 당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모든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매우 인간중심적인 생각을 정면으로 깨부순 코페르니쿠스는 인간이 우주로 나가려고 하는 이 상황을 예견했을까? 오만한 인간들이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저 하늘을 마침내 움켜쥐려 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을까? 생각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 물론, 현대 우주학자들이 밝혀낸 바는 조금 다르지만-모든 인간 또한 오래도록 가장 큰 별이었던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했다. 최근에 와서 지구를 벗어난 소수의 인간들은, 어디에 자신의 중심을 주었을까? 나는 내가 어디를 항해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노바.”
[... -치지직-]
“노바?”
[-치지지지직-]
한숨을 뱉고 노바를 부르길 포기하려던 찰나. 계기판에서 신호가 잡혔다. 뭐지? 한 번도 보지못한 신호였다. 나는 잠시 멍하니 눈만 깜빡이며 있었다. 저건 적어도 내가 아는 지구의 신호는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이 무소음의 공간에서 홀로 무력하게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방향은… 좋아. 거리도… 괜찮다. 지금 남아있는 연료로 지구까지는 못 갈 정도라 포기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연료라도 신호가 온 곳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 우주선은 나 혼자서 운행할 수 없었다. 벨라라면 몰라도… 나는 계속해서 노바를 불렀다. 지금껏 쌓아온 엔지니어 지식으로 노바를 고쳐보려 노력하면서. 나는 계기판의 무수한 레버들과의 실랑이 끝에 반쯤 성공했다.
“노바. 노바?”
[-치직- 예. 주 박사님.]
“아, 다행이다. 이제 좀 들리네요.”
안도의 숨을 뱉은 나는 산소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하고, 수치를 잠시 무시한 후, 노바에게 물었다.
“노바, 계기판에 새로운 신호가 수신되었는데, 그쪽으로 가서 확인하고 싶어서요. 우주선 운행을 도와줄 수 있나요?”
[-치직-알겠습니다. 먼저, 들어온 수신호를 분석해보니 지구의 것 같지 않습니다. 저 -치지직-는 의미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접근하시겠습니까?]
설마 했지만, 노바의 말을 들으니 살짝 무서워졌다. 하지만, 내게 그곳으로 향하는 방법 말고 남은 것이 뭐가 있는가? 동아줄이라도 붙잡아 봐야지. 그리고, 왠지 모르게, 뭔가 끌리는 느낌이 났다. 나의 중심이 이끌리는 느낌. 4대 힘 중 가장 약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만유인력처럼, 내 존재가, 질량이 원래 그곳의 영향 아래에 있던 것처럼 왠지 그곳까지 수월하게 도달할 수 있을 예감이 들었다.
“연료는 충분한가요?”
[...-치지직-]
“노바?”
[아슬아슬하게 연료가 허용하는 거리입니다.]
“부탁합니다. 가보고 싶어요.”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공기 분자의 공백은 아무런 소리의 파동도 전달하지 못했다. 그저 내 숨소리만이 청각을 자극할 뿐이었다. 다만 빠르게 깜빡거리는 계기판의 붉은 빛들, 흰 숫자들, 그리고 손으로 짚은 레버만이 진동으로서 내게 무엇인가가 시작되고 있음을 알렸다.
불안했다. 동시에 설레었다. 정확한 원인을 모른 채로 심박이 빠르게 뛰었다.
[-치직-엔진 가동 준비. 3. 2. 1.]
우주선의 정중앙을 목표에 맞춘다. 레버를 통해 섬세하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했다. 저기서 나를 기다리는 미지의 존재를 위해. 언젠가 본 SF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나왔던 것 같기도 했다. 우주선의 상하좌우에서 증기같은 것이 분사되었었지. 물론 지금 내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비슷한 음향효과를 상상하며 천천히 내가 할 일을 성공시켰다.
[방향 조정-치직- 완료. 준비 되셨습니까, 주 박사님?]
“그럼요. 안전벨트도 맸다구요. 어서 출발하죠.”
[알겠습니다. 설정 좌표는 목표 전 2km. 그 시점부터 속도를 줄이기 위해 엔진의 방출-치직- 방향을 바꿉니다.]
“네. 아, 그런 작업을 하면 연료가 좀 더 필요할텐데…그 정도 연료는 남아있겠죠?”
[-치지지직-제 판단으로는 69%로 안정권에 들어갑니다.]
애매한 숫자다. 하지만 별다른 수는 없다. 우리가 가까워지면 그쪽에서 우리를 발견하고 다가올 수도. 희망을 걸어본다. 나는 침을 삼키고 계기판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알겠습니다. 노바, 당신을 믿겠어요.”
[-치직-무사운행을 빕니다. 3. 2. 1. 점화.]
그 후 잠시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
“필라 씨, 저거 타 볼래요?”
나는 놀이공원에 와 있었다. 곳곳에 주황색 호박과 해골, 박쥐, 거미 모형들이 가득했다. 할로윈 시즌에 맞추어 한껏 분장한 사람들이 놀이공원을 누비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고양이 귀 머리띠를 쓴 인간 하나와 곰인형 탈을 쓴 인외 하나… 우리가 있었다. 이 정도면 피칠갑과 뿔, 가면따위로 분장에 힘을 주고 나온 사람들에 비해 우린 완벽하게 평범했다. 나는 필라 씨의 손 한쪽을 쥔 채 다음에 어떤 걸 탈까 고민하다가 난색으로 화사하게 빛나는 회전목마를 가리켰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말이라… 륭며는 저런 게 취향이야?”
“취, 취향이라기 보단! 보통 놀이공원에 같이 놀러온 사람들끼리 많이 타니까요!”
“왜? 지구에서는 가축 위에 올라타 빙글빙글 도는 게 유행이야?”
“유행이라기 보다는…음. 글…쎄요? 이유는 모르지만 말은 옛날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 거니까, 옛 시절의 감성을 느끼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빛이 예뻐서? 낭만 있잖…아요.”
이 말을 할 때 나는 회전목마에게서 눈을 떼어 필라 씨를 바라봤다. 그러고 말 끝을 흐렸다. 필라 씨가 쓴 탈 안쪽에 있을 그의 전구를 생각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따뜻한 빛을 상상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아니, 나 혼자만 침묵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필라 씨는 지금 곰인형 탈을 쓴 상태라 빛이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인형탈을 쓰고 있으니 지금 빛을 내고 있지도 않겠지만... 아니, 잠시만. 저 틈새로 새어나오는 빛은 뭐지? 나는 당황했다. 당황한 나머지 급하게 손바닥으로 틈새를 막았다.
“필…필라 씨?! 갑자기요?”
“륭며가 빛이 예쁘다고 했잖아.”
내게 빛을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내가 뻗은 손이 내 의도대로 향하게 함인지, 필라 씨는 몸을 더 가까이 해 고개를 숙였다. 빛이 손틈으로 새어나온다.
“...예뻐요, 필라 씨.”
그 말에 당신이 웃었던가. 직후 당신이 나를 위해 내어주는 빛조차 아까우니 내가 어서 끄라고 말했던 것 같다. 전구에 들어오는 빛은 당신의 배터리를 닳게 하니까. 예쁜 건 예쁜거고, 아까운 건 아까운 거라 말했던가. 당신과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으니까 아껴두라고 했던 것도 같다.
갑작스러운 알람음에 잠이 깼다. 이건 노바가 내 우주복과 연결된 스피커에 보내는 알람이었다. 소리를 전달할 매개가 부재하는 지금, 내게 우주선의 알람은 들리지 않았으므로. 언제 잠들었었지? 깨어서 생각해보니 현재 우주복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정상 범위보다 살짝 높은 것 같기도 하다. 어쩔 수 없다. 나는 남아있는 산소통의 산소가 부족했기에 최대한 노즐을 작게 열어두었다. 나는 몽롱한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앞을 바라봤다. 무엇때문에 알람이 울렸지?
그런데 한참 기다려도 노바에게서 음성안내가 들려오지 않았다. 왜지?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계기판과 연결된 작은 패널에 메세지가 하나 떠 있는 걸 발견했다.
‘엔진의 방향을 역으로 바꿉니다. 3.2.1’ - 47초 전
로그를 이렇게 띄우다니. 왜 그런 거지?
“노바?”
치지직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 나는 다급하게 패널을 조작해 연료가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다.
바닥이었다.
언젠가 이 우주선은 시스템 전력-물론 인공지능인 노바도 이 에너지를 쓴다-에 쓰이는 에너지와 엔진에 쓰이는 에너지가 동일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헛손질을 해가며 이 우주선의 현재 전력 사용 상태을 확인했다. 엔진, 각종 계기판과 패널들, 그리고…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노바는 없었다. 아, 노바가 말한 연료의 범위에는 자신까지 포함되어 있었나. 아슬아슬하다는 것이 이런 의미였나. 나는 우주선이 손상된 이후부터 혼자라고 느꼈지만 이제 정말 혼자가 되었다. 미뤄두고 있던 공포가 닥쳤다. 나는 정말 혼자 이 어둡고 광활하고 고요한 공간에서 생을 다할 운명인가? 가만히 앞을 보고 있자 눈에 밟히는 것이 있었다.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점. 저 계기판에 표시된 작은 점이 나를 우주적 고독 속에서 구해줄 마지막 보루였다.
나는 목적지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쩐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잘한 파편들이 우주를 부유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 그 중 크다 할 수 있는 파편들도 손가락 마디만한 것들이라 우주선의 외피에 맞고 튕겨나갔다.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긴장감이 높아졌다. 도킹할 때 우주비행사가 아주 섬세하게 우주선을 다루는 작업을 하듯이, 이 거의 텅 빈 공간에서의 이동은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게는 이제 노바도 없었다.
그러나 왠지 나에게는 내가 종래에 그에게 가닿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존재했다.
지난 두 달여간 수집했던, 엔지니어링과 우주선 조종에 관련된 얕은 지식에 기대어 나는 조종간에 손을 대었다. 앞으로 30초. 정확한 타이밍에 엔진을 꺼야한다. 손에 식은땀이 흐른다. 거의 바뀌지 않은 우주선 너머의 어둠에 살짝 몸서리쳤다. 앞으로 20초. 짧게나마 죽음에 관해 생각한다. 그리고, 이 너머에 있을 언젠가의 삶을 생각한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인간 외적의 존재를 만나게 될까? 지구로는 돌아갈 수 있을까. 생각의 초점은 과거로도 옮겨졌다. 내가 우주 연구 프로젝트에 자원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쯤 커피를 마시며 밤을 새고 논문을 쓰고 있겠지? 우주생물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러지 않는 나는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만약을 생각해보았다. 과거의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로 인해 또 다른 내가 존재한다면. 다중우주가 존재한다면 지금쯤 다른 세계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10초. 9초. 8초. 충격파가 전신에 퍼졌다. 기절할 정도로 큰 충격은 아니었으나 심정적으로는 기절하고 싶었다. 다급히 외부 카메라를 확인해보니 주먹만한 물체가 우주선을 치고 지나간 것으로 보인다. 방향이 틀어졌다. 또다. 또 부유하는 우주의 파편들이 나를 방해했다. 계기판의 도움으로 빠르게 계산해보니 이대로는 내가 구명줄-내 우주복과 우주선과 연결된 줄-을 달고 나간다고 해도 목표에 닿지 못했다. 공기를 채운 이산화탄소와같은 절망이 차올랐다. 하지만 엔진은 멈춰야 했다. 조금 어긋났어도 더 멀어지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2초. 1초. 정지. 숨을 크게 내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쯤되면 보일텐데…
안전벨트를 풀고 목표가 보일만한 창문에 다가갔다. 저기있다. 희끄무레하게 하얀 것. 그러니까…
“어?”
나는 당황했다. 우주선이 있을 줄 알았는데 어째서 본인이? 둥근 머리, 팔 두 개와 다리 두 개. 우주복을 입은 인간처럼 보였다. 다만, 내가 입은 우주복처럼 부피가 크진 않았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착각했다. 자세히 보니 홀로 우주를 유영하는 그는 우주복을 입지 않은 채였다. 그가 우리와 같은 몸을 가지고 있다면 기압차로 터지지 않나? 상식에 어긋난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내가 드디어 산소 부족으로 이지가 분명치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렇다면 저 우주헬멧은…
아니, 우주헬멧이 아니었다.
아.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그였다. 꿈속에 나오던, 함께 맨발로 바닷가를 거닐던, 놀이터에서 비눗방울을 불던, 같이 음악을 들으며 솜사탕을 먹던,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오토바이를 태워주던…
놀이공원에서 불을 밝혀주던 그였다.
별들이 선명해졌다.
기억이 선명해졌다.
나는 그에게로 갔다. 갈 수 밖에 없었다. 우주선과의 연결고리는 더 이상 필요없었다. 내가 돌아갈 곳은 이 우주선이 아니라 저 앞에 있는데, 어째서 우주선과 연결된 구명줄이 필요했겠는가? 나는 만유인력을 느끼며 우주선 밖으로 나아갔다. 이산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비합리적인 판단이라 해도 좋았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야 그는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으니까.
“필라 씨.”
가벼운 충돌이 일었다. 내 몸도, 마음도 그에게 부딪혔다. 우리는 날아갈 정도로 가벼웠다. 아니, 실제로 날고 있었다. 이 우주는 허무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하지만 적어도 나는 더이상 허무하지 않았다. 힘겹게 잡은 그와 얼굴을 맞댔다. 아니, 그에게는 얼굴이었겠지만 나는 유리헬멧이었다. 아, 이렇게 닮아졌다. 유리가 맞닿은 진동으로 가벼운 마찰음이 들렸다. 적막했던 내 숨소리에 섞인 그 소리가 기꺼웠다. 파직,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하다. 그의 필라멘트에서 빛이 조금 튀었다. 륭며, 하고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부딪힐 때의 관성 때문인지 우리는 서로를 껴안은 채 빙글빙글 돌았다. 별들이 춤을 추었다. 아니다. 춤을 추는 것은 우리였다. 그는 내게 몸을 맡겼다. 그가 힘없이 늘어져 있는 것이 느껴져 더욱 세게 안았다. 왜 우리는 이곳에서 만나야 했을까. 주위에는 그와 나, 그리고 내가 타고 왔으나 이제는 멀리 떨어진 우주선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곳까지 온 걸까. 그런 내 의문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그는 맞닿은 유리를 통해 끊어질 듯 말 듯한 파동을 전달했다.
“너를 만나려 했는데…”
“......”
“보고 싶었어, 혜령아.”
힘겹게 움직이는 그의 손을 본다. 마치 내 뺨을 감싸쥐듯 헬멧에 창백한 손이 닿는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도, 최선을 다해 이곳까지 와서 최선을 다해 나를 불렀구나. 그도 나도 이제 한계가 머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서로의 보금자리와 멀리 떨어진 이 어둑한 공백에서 우리는 만났다. 이 세계에서 만났다.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편하게 만났을 수도 있겠으나, 이 세계에서는 이 만남이 최선이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후회는 없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산소통이 거의 비었다. 힘겹게 손을 들어-우주복 상태에서 내 거동은 그리 자유롭지 않았다- 그의 손에 내 손을 겹친다.
“저도 보고싶었어요, 필라 씨.”
이 광활한 무소음의 세계에서 다시 한 번 당신을 만났다. 이미 내 몸에 있던 모든 수분이 빠져나가고 없는 줄 알았건만 다시 눈 위로 물기가 차올랐다. 그가 흐릿해졌다. 얼른 눈을 깜빡여 그를 다시 선명하게 했다.
“그런데 이게 마지막일 것 같아요. 마지막에 와서야 당신을 만났어요…”
나는 울먹이며 웅얼거렸다.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가 조금 더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이 상황이 기쁘면서도 원망스러웠다. 호흡이 가빠졌다. 시야가 다시 흐릿해졌다. 아까도 확인했지만 산소통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가지 말아요…”
본능적으로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누군가 나를 떠나는 건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이번에 떠나는 건 나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약간은 안심했다. 더 이상 누군가를 떠나보내지 않아도 되었음에 질 나쁜 만족을 느꼈다. 의식이 저편으로 넘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유리의 진동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
필라는 의식을 잃은 주혜령을 조심히 끌어안았다. 우주라 다행이지, 이 너덜거리는 팔로도 널 들 수 있으니. 필라는 자신들이 충돌한 지점과, 그곳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우주선을 보았다. 어떤 가능성을 떠올렸다. 필라는 자신이 버리고 온 것들과, 두고 온 것들과, 가지고 온 것들과, 마침내 찾은 가능성을 생각한다.
너를 만나려고 했는데… 잘 되진 않았어. 그래도 이렇게 만났으니 좋다. 그런데 가지 말라고 해야 하는 건 내 쪽 아니야? 이제야 만났는데 가지 마 혜령아. 잠들지마. 마지막은 아닐테니까.
들리지 않을 말들을 내뱉으며 필라는 천천히 우주선 쪽으로 이동했다. 사실 우주선을 끌어와 가까워졌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이 정도 거리는 본인의 자성으로도 간신히 통제가 가능했다. 필라는 다시 한 번 제 몸을 점검했다. 내재된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래도 목표를 달성할 정도는 되었다.
코페르니쿠스. 필라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그 글자를 보고 우주선 안으로 들어갔다. 우주선 안에는 주혜령이 쓰던 단말기, 펜과 노트, 구명줄, 우주식량이었던 쓰레기 등등이 부유하고 있었다. 필라는 주혜령을 조종간에 앉혀 벨트로 고정하고는 우주선의 해치를 닫았다. 조용한 충격이 우주선에 퍼진다. 필라는 생채기 많은 우주선을 보고 주혜령이 거쳐왔을 길을 얼핏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잠시 감상에 빠졌던 필라는 주혜령을 위해 피곤한 몸을 움직였다. 본인은 인간이 아니었지만 주혜령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주혜령에게 인간에 대해 배웠다. 필라는 주혜령과 보낸 시간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분명 자신이 직접 겪은 시간들은 아니지만 그 기억들은 어딘가의 자신이 갖고 있던 기억이었다. 필라는 그 기억을 소중히 여겼다.
자기 행성에 수리점을 차린 엔지니어로서 그는 마침내 고장났던 생명유지장치를 고쳤다. 다행히 우주선의 구멍난 부분-이 구멍때문에 우주선의 기압이 망가졌었다-은 제2승무원들의 냉동수면장치가 있던 곳으로, 해치를 닫으면 조종간과 분리할 수 있었다. 필라는 연결부의 해치를 닫아 잠그고, 생명유지장치를 가동시켰다. 우주선 내부의 온도와 기압, 산소 농도가 인간의 생존에 알맞게 돌아갔다. 경과를 확인한 필라는 조종간의 코드에 자신을 연결했다. 그의 남은 배터리가 연료가 되어줄 것이다. 우주선에 들어오자마자 교체해두었던 주혜령의 산소통이 발에 걸렸다. 곧 깨어날 주혜령이 위험하지 않게 그것을 선체 어딘가에 묶어두며 필라는 바닥난 몸을 이끌고 주혜령에게 다가갔다. 곁에 앉아 몸을 고정한 필라는 아직 깨어나지 못한 주혜령의 헬멧을 힘겹게 벗겨내었다. 얼음장같은 손이 뺨을 쓸어도 주혜령은 깨지 못했다. 미간이 움찔했을 뿐.
“륭며. 혜령아.”
필라는 주혜령과 가까운 쪽의 손을 움직여 깍지꼈다.
“…그때 네가 정말 좋아했잖아.”
필라는 약한 빛을 내며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머리를 맞대었다.
“륭며야, 따뜻해?”
필라는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의식이 꺼지기 직전, 선체에 어떤 알람 소리가 울렸다. 얼핏 빨간색으로 빛나던 계기판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새로운 신호가 수신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