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혔다."
"갇혔군요."
안드로이드 두 개체는 완벽하게 닫힌 문 앞에 약 삼십 분째 황망하게 서 있었다. 꽉 쥔 주먹이 마지막으로 개폐 장치를 내리쳤다. 탕, 금속과 금속 외피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변화는 없다. 공허한 소리는 공간에 마치 메아리처럼 전파되더니 결국 사그라들었다. 산소 유입 장치와 우주방사선 정화기만이 윙윙거리며 낮은 울림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복도와 방들의 조명은 꺼졌고, 이 객실 안에는 반을 먹은 감자칩과 한 달 전 간행된 잡지뿐 즐길 거리가 없었으며, 잠긴 문은 거의 30센티는 되어 뚫을 수도 없는 두께였다. 물론 진짜 문제는 그들이 반강제적으로 동참하게 된 감금 플레이가 아니다. (어디 감금에 자발적인 것이 있겠냐마는 우주는 넓고 우주의 넓이만큼이나 성적 페티쉬 종류는 다양하니까.) 방이 어둑하다는 것도, 여기가 십 분만 더 지내다 보면 지루해질 공간이라는 것도, 이곳을 탈출할 방법이 전혀 없어 보인다는 것도 정말로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우두커니 선 두 안드로이드는 서로를 마주 봤다.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준이 라우투스-093을 올려다봤고 라우투스-093은 준을 내려다봤다.
"이거 큰일 났네. 준, 레이저 빔 같은 거 쏠 수 있어요? 근데 신나도 되는 거 맞아요?"
"그런 기능은 없습니다. 의도적인 시체 손괴는 약 68.47%의 규정된 은하계에서 범법으로 간주된다고요."
그럼 대체 *정말로 심각한* 문제가 뭐냐 하면,
"저희가 당한 일도 합법은 아닌데요. 그럼 환풍구라도 뜯어서 기어가 볼까요?"
"지구에서 제작한 클래식 싸이파이 영화에서는 보통 주인공들이 100kg을 초과하지 않죠."
두 사람이 오른 함선이 우주 해적에게 약탈당했다는 사실이다. 모든 단어가 우습게 들리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준과 093은 각자의 장기 출장을 마치고, 쉽지 않은 일정 테트리스까지 거쳐 간만에 여행을 결심한 것이었거늘 휴가란 요원한 일이었다. 어쩌면 패키지 할인이 너무 높다는 점을 의심해 봐야 했을까? 고작 사백 개쯤 남아 있는 후기를 더 뒤지지 않고 여객선을 예약해 버린 게 실수였을까? 준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낭패다. 휴가에서까지 사건사고과 닦달할 계획은 없었단 말이다. 무기도 뭣도 준비된 것이라고는 없다는 말이다!
아무런 문제 없이 운항하던 배가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에 진입했을 때 침략은 일어났다. 스무 명 남짓 되는 패거리에게 배는 점거당했으며, 선장은 우주 공간으로 던져졌고, 모든 여행객은 각자의 선실에 갇히게 됐다. 안 그래도 요즘 국부은하군의 치안이 아슬아슬하다고 난리던데, 정말로 그랬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배가 카이솔 연합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관리받는 함선이었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경비는 철저하고 시스템은 완벽해서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오합지졸들에게 항해실을 통째로 내어주지 않았겠지. 두 사람은 잠깐의 해프닝에 대해 노닥거리다가 무사히 지구에 도착해 지금쯤 와이키키 비치에서 선탠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안드로이드 전용 플라밍고 튜브를 빌려 호텔 수영장에 둥둥 떠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상상에 준은 아주 약간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문을 걷어찼다. 한 여덟 번쯤 쾅 쾅 쾅. 준보다 앞서 박치기를 여덟 번 시도했던 093이 그를 겨드랑이 사이로 번쩍 들어 안쪽으로 옮겨두었다.
"다음 정비 때는 레이저 빔 기능을 추가해야겠어요." 093이 천진하게 말했다.
"저도요." 준도 우울하게 말했다.
Message from ..- -. .. ...- . .-. ... .
Hello from another world apart
이 2인용 객실 안에서 탈출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이라곤 녹슨 드라이버와 전파가 끊긴 라디오뿐이다. 캐리어의 바닥까지 긁어 보던 준은 옷가지를 대충 쑤셔 넣고 겸허하게 지퍼를 닫았다. 093은 이층 침대의 사다리에 걸터앉아 라디오를 뚝딱뚝딱 개조하고 있었는데, 그 물건이 겪는 게 더 나은 방향으로의 발전인지 고물로의 전락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사람들이 쓰던 거, 구형 EMP를 개조했던데요. 엄청 아날로그 감성." "덕분에 집적 회로가 불타서 실려 온 기계들 매립지에서 많이 봤어요. 저희는 코팅 처리된 점이 다행이죠!" 준은 바닥에 떨어진 여행 팸플릿을 주워 들었다. 첫 페이지에 구깃구깃하게 적힌 글자들은 초광속 여행의 장점에 대해 줄줄 읊고 있었다. 두 번째 페이지는 이 신형 함선이 얼마나 편안한 운항 서비스를 갖추었는지를 끝없이 자랑했고, 세 번째 페이지에는 이 배에 오르고 내렸다는 유명 인사들의 사진이 조잡하게 편집되어 있었다. 그 사이에서 승선할 때 받은 티켓과 내부 구조도가 포르르 떨어졌다. 준은 다시 허리 숙여 그것을 주웠다.
"연합이 지금 마페이 내전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노략질 문제는 그렇다고 치고, 좀 더 자발적인 호신의 차원에서 승객 매뉴얼을 갱신해야 한다고 봐요."
"환풍구 사이즈를 늘리는 것도 방법일 것 같은데요. 아니면 환풍구가 감당할 수 있는 하중을 늘리는 게 낫나?"
"제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습니다. 뭔가 상당히 부적절한 제안 또는 공상에 설득되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는 눈썹을 들썩이고 천장을 향해 고개 들었다. 모퉁이를 관통하고 지나는 환기구—공기 정화 장치의 기능을 겸하는—의 뚜껑과 그 안쪽 팬을 들여다봤다. 아무래도 정말 저 길밖에 없는 것 같은데. 키가 멀대 같이 크고 무게는 상대적으로 덜 나가는 안드로이드와 무게는 살인적이지만 키는 인간적인 안드로이드 둘 중에서 어느 쪽이 낫지? 준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그리고 기계 개조에 골몰하는 093을 일으켜 세워 환기구 아래로 슬금슬금 밀고 갔다. 이렇게 들어가게 되면 어깨에서 걸리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공간이 좁아도 머리만 넣을 수 있다면 전부 넣을 수 있는 게 인체의 신비인데. 준은 자신이 이 모험이자 도전을 원하는지 아니면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싶어 하는 건지 순간 헷갈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내 이성적인 결론을 내렸고 주섬주섬 겉옷을 벗었다.
"함선 구조 상 가장 가까운 외부 통로는 다이닝 홀로 이어지는 게 맞겠죠. 그들이 점거한 건 함선 앞쪽이니 아마 홀은 비어 있을 테고요."
"그동안 객실들을 지나쳐야 할 테니 꽤 오래 기어야겠네요. 가다가 통로가 좁아져서 끼면 어떡해요? 준, 그럴 땐 그냥 나 두고 가도 돼요. 아냐, 버리지 마. 아냐, 두고 가세요."
함선 지도 위를 마커로 직직 긋던 손이 멈췄다. 검지와 중지로 펜을 빙글빙글 돌린 준이 펜 뚜껑으로 093의 뺨을 쿡 찔렀다. 타박이라기보다도 일종의 애정 어린 핀잔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애초에 한 명만 들어가는 게 아니라고요? 한 명이 나가서 돌아와서 문을 열어준다, 그게 효율적이잖아요."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혼자 전진하는 건 외롭잖아요."
누가? 왜? 어떻게? 오도카니 서 있는 093을 그는 조금 외면했다. "인생은 원래 외로운 겁니다, 093. 그냥 견뎌야 하는 거예요." 겉옷은 허리에 묶고 의자를 끌어와 한 발 올라섰다. 그리고 쇳내가 나는 드라이버, 펜 두 개와 인공두뇌가 축적한 훌륭한 지식을 발휘해 출입구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093은 그의 말에 무어라 대답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제법 섬세한 전선을 만지게 됐는지 열린 채로 입을 다물었다. 각자가 각자의 작업에 몰두하는 침묵의 시간이 지난다… 이따금 두꺼운 벽 너머로 옆 객실들에서 수선한 소리가 들리다가 끊기기를 반복했다. 부디 그 일반인들이 제정신이 달려 환기구는 쳐다도 보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물러설 곳도 없는 좁은 통로에서 정 충돌하는 사태는 좋지 않으니까.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준이 환기구 덮개를 열고 안에서 흐르는 바람을 맞닥뜨릴 즈음, 093도 "됐다!" 경쾌하게 외쳤다. 준은 돌아보는 대신 심란하게 어둑한 통로 안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거 다행인 일이네요. 신호가 잡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메시지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함선들에게 무작위로 보낼 수만 있어요."
"뭐라고 보내고 있습니까?"
"글자 제한이 있어서요. 해적 점거. 구조 요망. 서로 돕고 삽시다."
준은 이제 한 가지를 더 기도하게 되었다. 아무쪼록 신호를 받은 게 동류 해적이 아니기를 바란다. 부디 선원들이 제정신을 갖춘 상식인이기를, 또 연합에 정식으로 인정받은 어엿한 카이솔의 일원이기를, 아무튼 이 일이 무사히 해결되기를. 센서에 미각 기능을 탑재한 이후로 온갖 잡동사니를 혀에 얹어 보던 093은, 개봉된 지 이틀이 지난 감자칩을 입안으로 밀어 넣고 "눅눅하군요." 정직한 평가를 던졌다. 준이 입을 벌리자 눅눅한 감자칩 대여섯 개가 그 안으로 넣어졌다. 두 사람은 한동안 꽉 찬 입을 우물거리고 손짓발짓으로 서로와 소통했다. 누가 통로 안으로 들어갈지, 그 끝에서 어디에 도착하게 될지, 최대 몇 분을 얌전히 기다려야 할지나 무엇으로 신호를 보내야 할지 등에 관한 내용이었다.
"높이가 부족할 것 같은데 업어드릴까요?"
"아니오. 엎드리세요."
준은 어렵지 않게 환기구로 상체를 반 밀어 넣었다. 건조하다 못해 황량한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아래쪽에서 093이 "어때요?! 따라갈까요?" 외치는 말이 먹먹하게 들렸다. 길은 끝없이 깊고 어두워서, 문득 앞을 분간할 수 있을지 '합리적인' 불안이 들었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도 와이키키 비치에서 죽는 게 맞겠지, 짧게 숨을 내쉬고 마신 준은 몸을 완전히 통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아니오, 다녀올게요." 마지막에 발을 잘못 휘둘러 실수로 093의 머리를 퍽 쳤고, 큰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했는데 올바르게 전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는 이게 유언이 되면 얼마나 웃길까 잠시 생각해 봤다. 그리고 팔꿈치를 밀어 앞으로 꿈틀꿈틀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팔뚝에 긴장이라도 놓치면 움직임이 쿵, 하고 육중한 기척을 냈다. 이래서야 해적들에게 나 여기 있소 광고하게 생겼다. 한계까지 팽팽하게 당겨진 기계 섬유의 수축을 느끼며 그는 끝없이 전진했다. 모퉁이를 네 번쯤 돌았어도 위치를 헷갈리지는 않았다. 불필요할 만큼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다만 잡생각이 조금 들었다곤 할 수 있다…
093은 따지자면 좋은 동거인은 아니다. 방 안을 쓰레기장으로 만들어 놓는 점이 그랬고, 대부분의 집안일에 영 재주가 없다는 점이 그랬으며, 그런 주제에 의욕과 호기심은 넘쳐서 일을 꼬이게 만들기 일쑤인 점이 특히 그랬다. 그는 093이 그러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라우투스-093이 대책 없고 황당무계한 어린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을 알았고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그날 그때 비겁하게 그런 제의를 했다. 무엇에 덤비는지도 모르고 함부로 인생을 내던지는 멍청이 안드로이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 믿고 무엇이든 연민해도 된다고 믿는, 하고 싶은 일이라면 단순하게 도전해 기꺼이 해내는, 고작 육 년뿐 세상을 알지 못해 정말로 두렵고 진실로 절망스러운 일이 어떤 건지 모르는. 아니, 아니지. 조금 다르다. 093은 모든 버려지는 것의 무덤에서 태어나 정말로 지독하고 진실로 가혹한 비밀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과정에서 나는 생채기쯤은 신경 쓰지 않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르지. 그건 현명한 걸까, 어리석은 걸까? 용감한 걸까, 아니면 무모한 걸까?
얕은 먼지가 한 차례 피어오르고 꺼졌다. 팔꿈치가 좀 쓰라렸다. 나뭇가지처럼 갈라지는 갈림길을 지날 때 종종 생경한 빛과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가엾은 승객의 것인지, 사보타주 범죄자들의 것인지 명료히 구별할 도리가 없어 준은 친밀감은 적당히만 느끼고 그냥 나아가기로 했다. '신혼여행인데 이게 뭐야.' '그러게 내가 외행성계로 가자고 했잖아.' 오, 저런. 조속히 구조해 드릴 테니 즐거운 신혼 되시기를. '이런 상황에서 잠이 와요? 뭐라도 좀 해 봐요!' '아니 그러면 어떡해? 너처럼 질질 짜라고? 아서라, 탈수 온다.' '둘 다 그만하고 여기 앉아 봐.' 간과하기 쉽지만 고립 사태의 무서운 점은 외부의 적보다 내부 분열에 있다. 부디 화살 방향을 현명하게 돌리시어 평화를 찾으시기를. '대장은 못 믿겠어. 항로를 바꾸면 연료도 부족하잖아.' '당연히 정거장을 들려야지. 어떻게 위장하느냐가 관건인데.' 얘들아, 정거장들은 보안이 삼중으로 되어 있는데 그게 되겠냐고. 머리가 있다면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라고.
멀찍이 난 덮개 너머로 희박한 조명 불빛과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는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결국 고개 돌려 모퉁이를 한 번 더 돌았다. 그러다 이윽고 멈췄다. 빛은 멀어지고 다시 까마득한 암흑과 적막이 주변을 사로잡았다. 산소 유입 장치와 우주방사선 정화기만이 윙윙거리며 낮은 울림으로 작동하는 가운데 이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 누군가 이 안에 들었으리라 상상하는 사람도 없겠지.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고 제대로 실감 나는 일이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내 휴가는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짐작하기 어렵다. 이러다 죽는 것은 무섭지 않다, 하지만 많은 죽음의 방법 중에서도 환기구에서 길 잃어 죽기라는 우스운 선택지는 있을 수 없다. 어쨌든 돌아가는 길은 없고 오직 나아갈 수만 있다. 준은 짧게 숨을 참고는 터뜨렸다. 093은 바보 같을지는 몰라도 셈이 빠르기는 한 모양이었다. 이 길고 어둑한 통로는 마음 한구석을 외롭게 만들었다. 그건 나약함과 반드시 결부되지는 않지만 번거롭기는 했다.
"준, 엄청 느리네요."
그러니까 이건 필시 나약해진 마음이 만들어낸 환청이어야 할 것이다. 아니, 환청일 것이다.
"와~ 좀 전에 신혼부부 싸우는 거 준도 들었어요? 결혼제도는 흥미롭다니까."
무언가 선명한… 대단히 형광을 띠는 녹색 불빛이 뒤쪽에서 깜박거렸다. 그는 눈을 의심하며 시선을 뒤로 던졌다. (고개를 완전히 돌리기에는 길이 좀 좁았다.)
"뭐합니까?"
"쫓아왔는데요."
093이 거기에 있었다. 두 눈을 비상구 표시처럼 번쩍거리며, 특유의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시선을 느끼자 손으로 브이까지 만들어 보이는 듯했다. 이 대책 없는 안드로이드는 그의 정강이를 쿡쿡 찔러대기까지 했다. 다행히 준은 소리 지르지 않을 정도의 이성이 남아 있었다. 방금까지 떠올리던 이런저런 잡념은 새하얗게 잊을 정도로 어이가 없어서 그럴 정신이 없다는 쪽에 가깝다.
"저희 팀플레이 하기로 한 것 아니었어요?"
"팀플레이 중이잖아요. 나는 기는 데 재능이 있나 봐요."
"아니, 아니. 당신이 기다리고 있으면 문을 열러 돌아간다고 했는데요."
"심심해서 따라온 거 아니고 걱정돼서 따라왔으니까 봐주십쇼."
심심해서 따라온 거다. 분명 라디오나 깔짝대다가 기어이 고장 내고 더 할 일이 없어서 슬쩍 통로로 기어 왔을 것이다. 저렇게 눈이 번쩍이니 옷으로 닦은 먼지 없는 길도 알아볼 수 있었겠고. 말문이 막혀 단어를 고르던 준을 093은 계속해서 쿡쿡 찔렀다. 대체 왜 이렇게 다섯 살 먹은 어린애 같지? 아니, 다섯 살밖에 안 된 어린애가 맞긴 하지만, 얌전히 기다리기만 할 거라고 생각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지만… "주-운. 안 가요?" 그는 곧 이 통풍구가 삼백 킬로그램도 넘는 하중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냈다. 그러고 보니 좀 전에 바닥이 조금 기울어지거나 뒤척인 것도 같다. 정말 언제 어디로 무너질지 모른다. 오싹한 예감이 어깨를 덮쳤고, "갑니다." 그는 입을 다물고 어느 때보다도 신속하고 신중하게 마저 기어나가기 시작했다.
말 없는 행군은 이어진다. 경사가 가파른 곳을 지나고 따분할 만큼 평평한 곳도 지났다. 상체를 치켜들 수 있을 만큼 널따란 곳도 아찔할 만큼 비좁은 곳도 모두 지났다. 목적지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는 간간이 방향을 일부러 틀어 밖을 내다보았고, 그런 다음에는 원래 길로 돌아왔다. 093이 눈을 깜박거리며 빛이 켜졌다 꺼졌다 했다. 그게 흡사 클럽의 야간 조명 같아서 준은 어쩔 수 없이 웃음이 났다. 어디 가서 말하지도 못할 어처구니없는 상황인데도 그랬다. 093은 사건을 시트콤으로 만드는 데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 명랑한 목소리 위에서 이야기는 쉽게 희극이 되고, 삶은 기껍게 가벼워진다. 과정이 지난하고 미래가 희미할지라도 모든 일이 잘 끝날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어쨌든 노을이 길게 지는 와이키키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한밤중 도로를 가로지르는 스쿠터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시답잖은 대화로 온 새벽을 노닥거리다 해 뜨는 때에 맞춰 모래사장에 뛰쳐나갈 수 있을 거라고… 순식간에 휴가가 끝나면 일상으로 돌아가 또 일을 하고 사람을 구하고 우주를 누비게 될 거라고. 언젠가 닥칠 종말의 순간에 같이 있지 않더라도— 우리가 우리를 믿는 한 느끼는 한 모든 게 정말 괜찮을 거라고.
네 개로 난 길목에서 기꺼이 두 번째를 고른 준은 마침내 출구에 도달해 드라이버를 꺼냈다. 시야가 어두운 게 문제였는데, 그는 훌륭한 인공 빛이 있음을 알았으므로 몸을 옆으로 비틀어 구기고 093을 불렀다. 찔끔찔끔 앞으로 기어 온 093은 좁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하게 조명의 역할을 수행했다. 불편한 자세로 끊임없이 꿈틀거리던 준은 길쭉한 다리 사이에 다리를 끼워 넣고 093의 머리를 팔꿈치 받침대로 쓴 다음에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밀착한 부분에서 바싹 긴장한 가슴이 천천히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느껴졌다. 약간의 온기, 생명체의 기척, 어렴풋하지만 앞을 밝히는 녹색 불빛. 그는 침착하게 손끝을 움직여 나사를 하나씩 풀고 093에게 건넸다. 093은 고분고분하게 받아서 들었다. 해체한 볼트와 너트가 일곱 개쯤 되었을 때 덜컹거리는 작은 소음과 함께 덮개가 열렸고, 그가 조심스레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나 있을 침입자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플래그는 플래그의 역할을 충실히 다한다. 불안하게 삐걱거리던 바닥은 이내 옴폭 꺼지더니 아래가 서서히 찌그러졌다. 두 안드로이드는 어떠한 예감 속에서 불현듯 서로를 마주 봤다. 접합부가 비틀리는 요란한 금속성. 비틀리고 터지고 부서지는 불길한 신호. 그래, 이게 삼백 킬로도 넘는 무게를 견딜 수 있을 리 없지. 팔뚝이 다급하게 팔뚝을 붙잡았다. 준은 겸허하게 눈을 감았고 093은 천장인지 바닥인지를 꽉 움켜잡았다.
그리고 중력에 이끌리는 추락.
"아!" 짜증.
그리고 둔탁하고 거친 충돌.
"아악!" 비명.
먼지구름이 크게 일었다. 다행히 찌그러진 건 환기구 일부일 뿐 두 안드로이드는 아니었다. "통풍구는 크기도 더 늘리고 감당 하중도 아주 많이 늘려야 해요!" 093이 강력하게 주장했으며 "동의합니다!" 준 역시 강력하게 맞장구쳤다. 두 안드로이드는 잔해 속에서 한동안 발버둥이쳤다. 충돌의 여파로 안 그래도 좁은 출입구가 더 좁아져서, 몸을 가두는 금속판은 마치 철창처럼 기능했다. 준이 093을 당겼고 093이 준을 밀었다. 이마와 콧날이 서로 부닥치고 뺨과 어깨가 닿아 눌리다가 유감스럽게도 손바닥이 허벅지를 마구 더듬어댔다. 체감으로는 거의 목숨을 건 사투 끝에 두 안드로이드는 간신히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둘은 지구에서 제작한 클래식 싸이파이 영화에서처럼 상당히 만화적으로, 혹은 영화적으로 잔해를 헤치고 나왔다. 캘록거리며 준이 무릎을 세워 일어섰다. 준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려 있던 093도 옷깃을 탁탁 털며 불만스럽게 일어났다.
그렇게, 스낵 바에서 뭔가를 먹고 있던 해적 셋을 두 안드로이드는 마주친다. 뭔가 어색한 침묵이 공간을 휑하게 지났다. 그중 한 명은 당황했는지 얼어붙은 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는데, 안에 보이는 내용물이 딸기 잼을 바른 토스트여서 준은 조금 화가 났다. 우리는 눅눅한 감자칩이나 먹었는데 이것들은 우주 범죄자 주제에 호사를 누리다니? 그는 차분하게 허리 숙였다. 바닥에서 두꺼운 금속판을 잡아 들었다. 그리고 허리를 펴 그것을 정확하게 그 해적에게 던졌다. 단말마의 고함과 함께 겨냥이 정확히 명중하자 093은 높고 경쾌한 휘파람을 불었다. "골인! 제법인데요!" 그러더니 자신도 의자를 잡았다, 그리고 던졌다. 그런 즉시 우당탕 앞으로 신나게 뛰쳐나갔다.
여전히 재즈가 흐르는 다이닝 홀에서 한바탕 난리가 일어난다.
"요즘 해적들은 물이 별로네요. 이러면 먹고 살 수나 있나."
"해적들이 물이 좋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 아니에요?"
A.K.A 해적왕—그냥 평범하게 이 오합지졸의 우두머리인 작자다—을 묶어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그 위에 앉은 준은, 다리를 꼬고는 패널을 두드렸다. 마찬가지로 A.K.A 해적왕의 왼팔—그냥 평범하게 이 오합지졸의 이인자다—이라는 놈 위에 앉아 있던 093은 땀내가 나는 해적 유니폼을 드디어 벗었다. (둘은 다이닝 홀에서 제압한 해적들의 옷을 탈취해 갈아입고 조종실에 안전하게 들어왔는데, 그 경과에 대해 소상히 밝히면 이야기가 지나치게 길어지니 생략하겠다.) 준이 카이솔 요원과 교신하는 동안 093은 그 옷을 제 의자의 얼굴에 마구잡이로 들이댔다. 너희들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나는지 따위의 매도로 시작해 위생의 중요성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설파했다. 준은 그 웃기는 말들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끊긴 통신 채널을 다시 연결하고 가까운 정거장에 메시지를 보냈다. 정거장은 연료를 실은 경호선을 몇 척 보내겠다고 바로 화답해 왔다. 메시지에 확인 답을 보내고 주행 항법을 자동으로 설정한 그가 빙글 뒤로 돌았다. 093은 포박당한 해적들로 인간 볼링을 하고 있었다. 사실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그건 해적 유니폼이 093에게 정말로 그린 듯이 잘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오죽 잘 맞았으면 해적들이 바뀐 동료도 못 알아볼까. 그러나 준은 그 사실을 영원히 함구하기로 했다.
"정거장이나 근처 함선에서 보고된 구조 신호는 아무것도 없었대요."
"개조가 불완전했나 봐요. 아니면 자기장 때문일 수도 있고."
이 해적들에게 실수가 있다면 그들이 건드린 배에 우연히 솔러스 귀환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필 통풍구를 기어다닐 수 있을 만큼 이상하고 멍청한 안드로이드들을 만났다는 것이다. 비록 각자의 메이저코드는 보통은 전투에 쓰이지 않는 보조 능력이었지만, 우주 멸망을 목도했고 미친 프로토게노이도 토벌했으며 거기에서 살아 돌아왔는데 그런 그들이 하지 못할 일이 대체 뭐가 있겠나. 의자와 금속판으로 무장한 둘은 총까지 탈취해 해적을 각개격파 했다. 준이 기억을 재현해 감각을 교란했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093은 물리적으로 두드려 팼다. 조종실에 있던 너덧 명까지 어렵지 않게 제압한 둘은 스낵 바에 다녀와 토스트에 딸기잼과 땅콩버터를 듬뿍 발랐다. 잼은 또 얼마나 치덕치덕 발랐는지 끈적한 액체가 턱과 손바닥으로 흘러내렸고 준도 093도 (빼앗은) 유니폼으로 그 얼룩을 닦아냈다. 그리고 우유와 시리얼까지 가져와 화목한 식사 시간을 즐겼다.
"좀 늦었지만 지구에 무사히 갈 수 있겠네요. 호텔 하루 숙박비가 아깝긴 하지만."
"여행자 보험이 있어서 괜찮습니다. 잘하면 정신적 손해 배상도 받을 수 있겠는데요."
"용감한 우주 시민상 같은 건 없나? 그럼 슬슬 눈물 센서도 달아야겠다. 같이 대본 짜서 연습도 해요."
"아, 레이저 빔도 잊지 말고요."
부부 사기단 같은 작태에 해적 한 명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했지만, "에어로크로 던지기 전에 조용히 있으세요." "인간 이하는 여기서 말할 자격 없죠." 동시에 날아든 매서운 문장 두 개에 그냥 닥친 듯했다.
준은 기지개를 쭉 켰다. 눈가를 꾹꾹 누르고는 인간 의자를 정중하게 걷어차고 소파로 몸을 던졌다. 몇십 분을 조심히 기어다니느라 그야말로 진력을 쓴 탓이다. 정말이지 따뜻한 지구의 공기가 맡고 싶었다. 에메랄드빛 해변과 모래사장과 높은 야자나무의 심상이 그립다 이 말이다. 이 개고생에 의미가 있다면 오직 휴가를 더욱 값지게 만들어준다는 점에 있다. 093도 해적 한 명을 조련하다 말고 고개를 젖혔다. 준이 검지를 까딱거리자 느릿느릿 다가와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고개 두 개가 서로를 향해 느슨하거나 삐딱하게 기울어지고 적당한 거리에서 멈췄다. 준은 손 뻗어 어린애처럼 엉망이 된 093의 머리칼을 툭툭 정리해 줬다. 그러고는 눈꼬리를 다 접어 비죽 웃었다. 그 표정에 093은 한쪽 눈썹을 들썩였다. 경계하는 모양새였으나,
"093, 안내 방송해 보고 싶지 않아요?"
이제 093은 솔깃한 것 같았다. 당연히 그렇겠지.
"—오, 함장처럼? 내가 해도 돼요? 맡겨줄 거예요?"
"예, 함장처럼. 당신이 해도 돼요. 맡기고 말고요."
마치 도전을 받은 챔피언처럼 093은 결연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쏜살같이 달려가 조종간 가운데 앉는 권력을 누렸다. 가엾은 탑승객들을 위해 상황이 정리되었음을 알리고 안전을 위해 정거장에 체류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필요한 모든 조치를 마치고도 093은 왱알거리며 이동 상황을 중계하고 심지어는 해적들의 심정을 인터뷰하기 시작했다. 저건 티배깅 아니야? 사실 영광스럽게도 준이 첫 번째 방청객으로 소개될 뻔했으나 그가 피로를 이유로 들어 점잖게 사양했다. 그는 소파에 길게 누워서, 제대로 늘어져서, 마이크를 쥔 채 신이 난 파트너를 구경하다가 이윽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루미늄-리튬 합금, 티타늄 알루미나이드, 스테인리스 스틸, 케블러 섬유, 세라믹 타일, 에폭시 수지… 서로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기계 장치들이 부딪치고 마찰하며 잘그락거리는 미세한 소리를 내고, 중량 함선 내 유압을 제어하는 핵심 중추가 허파를 부풀리면 갓 태어난 아이가 첫 숨을 들이마시듯 고요한 파문이 윙윙대며 퍼져나갔다. 거대한 함선이 하나의 생명처럼 기능하며 쉼 없이 내뱉는 고속 운항의 산 증거 속에 그는 그 모든 발음을 하나하나 감각하고 기억하며 가만히 누워 있었다. 막막한 암흑, 간혹 명멸하는 별들과 두 안드로이드를 가르고 선 유리창에 얕은 진동이 서렸다. 그는 고개를 반짝 기울였다. 배가 항로를 약간 틀었군, 쉽게 알아차렸다.
093은 방에서 라디오를 챙겨오고는 준의 곁에서 다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 상황이 해결되었다는 메시지를 한 번 더 보내겠다고 했다. 준은 그러라고 답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창 너머로 소행성 한 무리가 들판을 질주하는 양 떼처럼 내달렸다. 앞으로 가는 것과 뒤로 가는 것의 속도가 교차해, 낯선 방문자들은 지평에 무수히 쏟아지는 유성의 형태를 빌려 우주에 현현한다. 빛의 꼬리가 제각기 길어지고 변덕스레 소멸했다. 그 자유로운 모양새에 정신이 팔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외계를 내다보던 낯은 기척을 죽였다. 일견 경건하게 우주적 우연의 찬란한 산물을 목도했다. 준은, 아날로그 라디오에서 송출된 구조 신호가 어디로 갔을지 상상해 봤다. 그것이 바다 위 유리병처럼 이 넓고 넓고 넓은 우주를 배회하다가 어느 땅에 도착할지 또 어떤 이의 손에 들어갈지 생각했다. 그 사람은 황당해할까, 그 말을 믿을까? 곧바로 도움을 보내줄까? 누가 언제 그런 문장을 보냈는지 가끔 궁금해하게 하게 될까? 어쩌면 그럴 것이다. 어쩌면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된 기계가 보낸 문장이 정처 없이 깜박거릴 때, 과정이 지난하고 미래가 희미할지라도 나는 그것이 광막한 검은 세계 한편에 분명히 새겨졌음을 안다. 필요한 이에게 닿을 때까지 어딘가를 떠돌고 있음을 안다. 닿는다면 전해질 것임을, 전해진다면 우습게도 어떤 외로움을 덜어내 가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할 수 있다. 그건 언젠가 나에게, 내가 없는 당신에게 그렇게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그러길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먼 우주에서 보내온 이름 없고 근거 없고 맥락조차 없는 이상한 문장이 어느 하루를 문득 즐겁게 하기를. 혹은 약간 진지하게 하기를. 어쨌든 심심하지 않은 사건이 되길. 093은 준을 따라 소파에 길게 누워 늘어졌다. 자리가 좁았지만 그는 불청객을 내쫓지 않았다. 다리와 다리가 겹쳤고 팔뚝과 어깨가 가볍게 맞닿았다.
대책 없고 황당무계한 어린 안드로이드를 집에 들이기 잘했다. 그건 아마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될 것이다. 당신을 만나서 기쁘다, 덕분에 나는 별로 외롭지 않다.
"재미있었다." 093이 말했다.
"재미있었죠." 그도 답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