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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19시 24분 05초

 

그는 마른 입술을 몇 번 뻐끔거렸다. 강화 유리 너머 광원이 빛을 드리웠다. 그림자가 그의 얼굴을 덮었다.

「사고율 0.0000001% 이주선! 당신이 그 행운의 주인공입니다!」는 슬로건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0.0000001%의 확률로 불행에 당첨된 그와 탑승객들이 문제였을까. 이주선은 산산이 부서졌고 운 좋은 이는 기압 차이로 인해 즉사했다. 어중간하게 운 나쁜 이는 우주복을 입은 채 천천히 바닥을 치는 산소와 함께 사흘간 절망하며 죽어갔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 살아남아 결국 죽어가고 있는 그는 탑승객 중에서도 가장 운 나쁜 이였다. 이주선이 터져나가던 순간 그녀의 억센 손길에 구호선으로 등 떠밀린 그는 무려 네 달간 죽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이주선과 함께 명을 달리하는 게 더 좋았을지도 몰라.’

그가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중에도 성실한 로봇 청소기는 바닥을 쓸었다. 구호선 내 청정 시스템은 「우리 구조선. 97일째. 방사선 유출 없습니다.」라며 기계음으로 답했다. 사람이 전기와 음파를 먹고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애석하게도 그는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기에 바닥을 보인 식량 창고 앞에서 천천히 죽어갈 뿐이다.

광원의 각도가 바뀌자 이내 환한 빛이 그의 망막을 태우려 들었다. 눈이 부셔 고개를 돌릴 만도 하건만, 그는 그럴 힘도 없는 것처럼, 단지 눈을 감았다. 거대한 먹이를 삼킨 아나콘다는 몇 달이 되도록 소화를 시키기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비록 아나콘다와 달리 그의 배는 텅텅 비어 비틀어지기 직전이었지만, 뭐라도 하기 위해 몸을 일으킨 순간 빈혈에 의해 머리를 박아 죽는 편이 더 빠르리라는 계산 하에 영리하게도 그는 가만히 누워 생각하기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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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0일 15시 09분 39초

 

“태양은 시각을 알려주는 유용한 존재죠. 과거엔 그림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시간을 유추했다고 합니다…. 그림자가 건널 수 없는 시간의 틈을 만들어낸 것이죠. 건널 수 없는 틈이 있다는 점에선 시간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군요. 같군요. 같군요. 같군요. 같군요. ………. 당신에게. 오늘의 추천곡. 스콧 맥켄지의 「San Francisco」.” *잡음*

 

“또 말썽이에요?”

“얼마 전에 또 흑점이 폭발했다고 하던데, 여기까지 도달했나 봐.”

“이주선 기기에 이상만 없으면 좋겠어요. 불안하잖아요….”

 

그녀는 몇 번 라디오를 두드렸다. 라디오가 받은 건 지구 DJ의 라디오 방송 전파가 아니었다. 일찍이 전파가 닿을 수 있는 거리로부터 한참 지난 이주선은 더 이상 그녀가 즐겨 듣던 라디오 방송을 잡지 못했다. 여러 밤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라디오를 거의 죽일 듯 때리는 그녀를 위해 그가 늙은 탑승객 한 명에게 사정해 받아온 라디오 방송 녹음본이었다. 그 녹음본 덕에 그는 밤중에 그녀가 라디오를 잔혹하게 폭행하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 철 지난 팝송을 잔잔하게 들어야 했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그녀는 아쉬운 시선으로 라디오를 내려다보다 시선을 돌려 그의 배를 껴안으며 침대에 누웠다. 그는 이 이주선의 승객이고 그녀는 이주선의 안전 요원이었으니 명백한 직무 태만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포함해서 이 행태를 비판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지구력으로 벌써 연말이었다. 신(新) 행성으로 이주하는 동안 탑승객들은 노동하지 않았지만, 지구를 떠나 우주를 가르면서도 그들에게 연말은 이유 모를 감격과 태만을 선물하는 법이었다. 수백 개의 우주 항로를 기반으로 AI 선장이 이주선을 운전하고 있으니 안전 요원의 이 정도 일탈은 모두가 눈감아주는 분위기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이브랑 당일엔 술에 취한 사람들 진정시키느라 바쁠 것 같아서.”

그녀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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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19시 24분 35초

 

투명한 목걸이가 그의 목덜미에서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는 이 안에 그녀가 있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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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0일 15시 11분 59초

 

“이게 뭐예요?”

“내 유전자 랩 다이아몬드. 요즘은 이런 게 유행이라던데.”

 

목에 걸린 작은 랩 다이아몬드는 맑고 투명했다. 고전 시대엔 죽은 이의 머리카락을 엮어 장식품을 만들었고 몇 년 전에는 유골로 메모리얼 주얼리를 만드는 게 유행이었다. 사람들은 그것만으로 부족했는지 사랑하는 연인에게 ‘항상 당신의 옆에 있을게요.’라는 의미로 서로의 유전자를 담은 랩 다이아몬드를 선물했다.

그는 멍하니 그녀의 일부를 담은 랩 다이아몬드를 매만졌다.

어쩐지 섬뜩한 유행이라 생각한 적도 있다. 항상 당신의 옆에 있겠다는 의미로 자신의 유전자를 선물한다니, 고문명 시대의 낭만이란 이런 것일지 당황스러움까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받은 랩 다이아몬드는 어쩐지 그를 고양시키는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낭만이나 로망엔 관심도 없어 보이던 그녀가 연인을 위해 이런 선물을 준비하다니, 어딘지 모르게 깜찍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는 몸을 돌려 그녀의 얼굴에 잔뜩 입 맞췄다. 고마워요, 너무 마음에 들어요. 어쩌다 이런 선물을 할 생각을 했어요? 감동이에요. 주책맞게 느껴질 수준이었다.

 

“내 유전자 랩 다이아몬드는 없는데 어떻게 해요?”

“신행성 도착하면 그때 만들어야지. 몰래 만드느라 네 유전자는 못 가져갔단 말이지.”

“전에는 내 머리카락도 숭덩 잘라 갔으면서요?”

“이거랑은 또 다르잖아.”

 

그녀는 그의 코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웃었다.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고 맑게 웃었다.

 

“소중히 간직할게요. 신행성에 도착하면 내 것도 선물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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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0일 15시 15분 06초

 

이주선 N0-10v2 로그

: 2024년 12월 23일 15시 15분 06초. 흑점 폭발로 인한 엔진 손상. 동력 소실. 이후 로그 백업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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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0일 15시 16분 58초

 

방금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그녀가 억센 손길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가 구호선의 문을 닫자 등 뒤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우주엔 산소가 없으니까.

단지 그와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구호선 안을 채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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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19시 24분 35초

 

몸을 움직이는 건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를 어루만졌다. 예전부터 그랬다.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로봇 청소기가 툭툭 그의 다리를 두드린다.

그는 공포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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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5일 01시 09분 11초

 

“자가 동력에 문제가 있어.”

“괜찮은 거예요?”

“고친다면.”

 

그녀가 우주복을 단단히 챙겨 입으며 말했다.

 

“이전처럼 잘 고친다면.”

“…안 괜찮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려요.”

“우주여행이 다 그렇지. 난 처음부터 이 이주선 안 믿었어.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근무태만을 저지르긴 했지만.”

“지금 장난이 아니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침묵 속에서 로봇 청소기가 그녀의 발을 툭툭 밀었다.

그녀는 로봇 청소기를 돌려 멀리 보낸 뒤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네가 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도 난 훈련 받아서 어느 정도 만질 수는 있으니까. 방법이 없다는 거, 알잖아.”

“그냥, 무서워서 그래요. 지금 당장 구호선이 터져나갈 것도 아닌데, 조금… 하루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요?”

“안 돼. 아직은 괜찮지만, 압력, 보온, 산소 시스템 모두 동력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아. 표류가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데 긴급 동력을 낭비할 수 없어.”

 

그녀는 헬멧을 뒤집어쓴 뒤 격벽을 열었다. 격벽의 그림자가 그들 사이에 길게 늘어졌다.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투정을 부리고 있는지. 단지 불길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잡기엔 그들이 마주한 상황이 심히 적대적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선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헬멧 위에 입 맞췄다.

 

“조심해서 다녀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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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5일 05시 29분 59초

 

빗소리처럼 가이거 계수기가 울었다.

그는 귀를 막고 그녀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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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5일 05시 42분 02초

 

초조한 시간이 지났다.

몇 시간 만에 돌아온 그녀는 격벽 너머에서 구호선이 압력을 맞추길 기다리며 그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가이거 계수기 소리가 섞여 들렸다.

 

“틱. 티디딕. 틱. 티틱.자가 동력은 틱. 틱. 티딕. 틱딕. 티딕. 복원됐어. 보 틱. 티딕. 강도 철저히 티디딕. 티디디딕. 티틱. 틱. 했으니 망가질 일은 틱, 티틱, 틱. 틱. 틱. 티디디틱.”

 

그들 사이에 침묵이 돌았다.

가이거 계수기는 계속해서 빗소리를 냈다. 압력 조정이 완료되었다는 청정 시스템의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격벽은 열리지 않았다.

그림자가 짙었다.

이내 그녀는 포기한 듯 헬멧을 벗으며 고백했다. 반쯤 녹아내린 얼굴이 작게 경련했다.

 

“우주복이 틱. 티딕. 틱. 피폭됐어. 구호선은 티디딕. 틱. 딕. 날 틱. 틱. 틱. 틱. 오염물질로 틱. 티딕. 틱. 틱. 틱. 열리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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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19시 28분 27초

 

그는 과거에도 종종 그녀와의 이별을 생각했다. 그녀와 크게 싸우거나 일에 채여 바쁠 때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 소설 속 주인공들이 비극적인 이별을 맞이할 때 특유의 상상력이 발휘되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우리 중 누군가가 불치병에 걸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슬픔 속에 보내는 상상을 해본다. 그녀는 그에게 폐 끼치길 싫어하니 그에게 이별을 고할지도 모르겠다. 상상 속의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 매달린다. 싫어요, 끝까지 같이 있을래요. 그녀도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받아들인다. 두 사람은 그동안 하고 싶었던 것을 모두 하며 최후를 기다린다.

어떤 드라마는 갑자기 개발된 치료제로 불치병에 걸린 주인공을 치료한다. 어떤 영화는 가차 없이 주인공을 죽이고 슬퍼하는 주인공의 연인을 담는다. 상상의 끝에서 그는 항상 다짐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그녀와 함께 있자고. 그들은 누가 뭐라 해도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니까.

다만, 그들에게 닥친 현실은 너무나 적대적이었다.

닿지 못해도 상관없어요. 피폭됐다고 해도 아직은 시간이 남아 있잖아요. 당신이 죽기 전에 분명 구조될 거예요. 그렇게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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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5일 16시 02분 51초

 

이주선 N0-10v2-R 로그

: 피폭 물질 제거 및 방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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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6일 07시 18분 29초

 

격벽은 열려 있었다.

그 누구도 없었다.

「피폭 물질이 제거되었습니다. 안심하시고 구조대의 구출을 기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로봇 청소기가 발발거리며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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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19시 28분 30초

 

그는 그날 이후 혼자 남겨졌다. 전기를 먹고 사는 로봇 청소기 한 대와 피폭 물질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다며 97일째 으스대는 청정 시스템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죽어버리면 쓰레기로 분류해 그를 내다 버릴 잔인한 섭리처럼 보였다.

그는 그녀의 죽음에 더 오래 슬퍼하기는커녕 그 시스템에 공포를 느꼈다는 사실에 더 괴로워했다. 이대로 죽어버리는 건 어떨지 생각하면서도 식량 큐브를 입에 집어넣는 자신이 싫었다.

입에 쑤셔 넣을 식량 큐브도 없었을 때 그는 일종의 안도감마저 느꼈다.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멈출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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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25일 17시 09분 39초

 

“태양은 시각을 알려주는 유용한 존재죠. 과거엔 그림자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고 시간을 유추했다고 합니다…. 그림자가 건널 수 없는 시간의 틈을 만들어낸 것이죠. 건널 수 없는 틈이 있다는 점에선 시간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군요. 하지만 지구는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돌죠. 그림자도 함께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그림자를 따라 걸어 나가다 보면 건널 수 없었던 틈은 어느새 시간과 시간 사이. 나와 그 사람 사이에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아, 벌써 해가 질 시간이군요. 오늘 하루, 수고하신 당신에게. 오늘의 추천곡. 스콧 맥켄지의 「San Francisco」.”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You're gonna meet

Some gentle people there

For those who come to San Franci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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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6일 23시 09분 39초

 

“내가 당신을 만난 건 기적이에요. 이렇게 긴 역사 속에서 우리가 같은 시대에 태어날 확률. 그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우리가 만날 확률. 만나서 사랑하게 될 확률. 이 모든 게 기적인데 왜 더 기적을 바라면 안 돼요? 우리가 사랑하게 된 것부터 기적인데, 왜 당신이 건강해지는 기적은 바라면 안 되는 건데요! 싫어요. 난 당신이랑 함께 있을 거예요. 절대로 멀어지지 않을 거예요….”

 

백혈병에 걸린 남자 주인공 앞에서 여자 주인공이 펑펑 울며 사랑을 고한다.

그는 잠에 든 그녀를 자신의 무릎에 눕히며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기적이라면. 그렇다면 그와 그녀가 만나 사랑하게 된 것도 기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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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9년 3월 6일 17시 59분 39초

 

“이것 봐. 800년도 전에 죽은 인간 잔해야. 로봇 청소기가 빨아들인 모양이군.

“문화유산을 이런 고철덩이가 삼켜버리다니.”

 

그들은 로봇 청소기를 분해하며 먼지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그래도 이 다이아몬드는 쓸만하군. 이것 봐. 그 시대에 유행했다는 유전자 랩 다이아몬드야. 보존성은 확실하니 복원도 가능하겠어.”

“그런 건 유전 대폭발 때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지구나 신행성이 아닌 우주 한복판에서 죽어서 여파가 미치지 않은 모양이지. 아마 복원도 가능할 거야.”

“이런 낡아빠진 구호선에서 대박을 건졌군. 기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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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23시 03분 39초

 

격벽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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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9년 5월 10일 12시 03분 53초

 

그녀는 이 시대가 지루했다.

지구와 신행성에 존재했던 인간의 유전자 대부분이 소실되었다는 유전자 대폭발 이후 태어난 첫 번째 복원 인간이었다.

유전자만으론 기억을 보존할 수 없어 그녀에게 있어 고향은 이 시대였다. 이 시대 질병에 대한 항체가 없는 그녀는 한동안 수많은 항체 주사를 맞았다. 문화에 대해 배우고 언어를 배웠다. 그녀의 복원은 생물학적으로, 역사적으로도 대단한 것이었으나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들은 생물학적, 역사적 발견에 심드렁했다.

그녀와 이 시대 사람들 간 외관 차이는 없었다. 그렇기에 원한다면, 그녀는 이 시대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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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23시 03분 50초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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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9년 5월 13일 18시 17분 02초

 

그녀는 이 시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녀에게 864년 전의 기억 따윈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시대에 대한 향수도 없었다. 그녀의 가족이나 친구, 연인도 기억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864년 전에 두고 온 것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그곳이 아닌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라는 듯 울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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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9년 5월 15일 11시 28분 47초

 

“기억 안 나? 네 유전자 랩 다이아몬드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고.”

“기억 안 나.”

 

연구자는 이마를 쓸며 그녀를 바라봤다. 자기 말을 귓등으로 들어먹는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검증받으니 기분이 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직접 시신을 본 건 아니야. 860년도 전에 죽은 사람인데 살이나 뼈는 다 썩어서 없어졌지. 기내에 큰 물체를 빨아들이고 고장 난 로봇 청소기를 까보니 그 안에 먼지처럼 뭉쳐 있었던 거야. 너와 정체 모를 사람이.”

“그 사람이 내 가족이었을까?”

“모르지. 신원을 특정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네 부모님이나 형제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지. 아니면 우연히 같은 구호선을 탄 생판 남이거나. 아, 네 성격에 어렵겠지만 연인일 수도 있겠다.”

 

그녀를 복원해 준 연구자가 킥킥 웃었다.

연구자를 무시하고 그녀는 자신의 목덜미를 문질렀다. 약 860년 전부터 그녀는 목걸이에 달린 작은 다이아몬드 형태로 존재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왜 자신을 목에 매고 있었을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작은 설렘에 그녀의 심장이 뛰었다.

이 시대에서 눈을 뜨고 처음으로 해보고 싶은 것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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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23시 05분 29초

 

“당신을 찾고 싶었어. 유전 정보로 외모는 재현할 수 있어도 기억은 재현할 수 없었으니까. 어쩌면 그 사람이 내 가족이나 친구였을 수도 있고. 난 아무런 기억도 없지만 그 사람은 나에 대해 알고 지 않을까 해서.”

 

그녀는 격벽 너머에 선 채 그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는 닮지 않았어. 타인이라고 하기엔 넌 나 아는 눈치야. 그리고 친구보단… 연인이었을 거란 생각이 먼저 들어.”

 

그녀는 여전히 격벽 너머에 선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 조그마한 유전자로 내가 복원된 건 기적이래. 사망률이 99%에 달한다는 사건 지평선을 넘어 이 시간대에 도달한 것도 기적이지.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구식 구호선에 올랐는데 그곳에 네가 있는 것도. 너는 상상도 못 할 기적이야.”

 

그녀는 다시 격벽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러니 네가 이 격벽을 열어준다는, 작은 기적을 보여주면 더 만족스러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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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23시 05분 34초

 

이주선 N0-10v2-R 로그

: 격벽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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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9년 5월 15일 11시 28분 47초

 

“정말 사건 지평선으로 향하겠다고? 99%가 죽는다는 그곳을? 그곳을 넘으면 이곳으로는 못 돌아와. 유전자로 864년 전 사람을 복원할 수는 있어도 그 시대 사람을 데려오는 건 못한다고.”

“돌아올 생각 없어.”

 

그녀는 작은 우주선에 분주히 물건을 채워 넣으며 대꾸했다.

그녀를 복원한 연구자는 머리를 북북 문질렀다.

 

“이렇게 목숨 버리라고 널 복원한 줄 알아?”

“이제 연구비 지원도 안 나오니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도 된다고 한 건 너야. 평범한 사람이 자기 목숨 멋대로 쓰겠다는데 무슨 참견이지?”

“네가 860년 전 사람이 아니라 진짜 평범한 사람이어도 말려. 누가 사지로 걸어 들어가겠다는데 내버려둬?”

 

제자리에 서서 소리만 지르는 연구자를 지나쳐 모든 짐을 실은 그녀는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온갖 식량과 원시적인 무기를 챙기니 작은 우주선엔 그녀와 사람 한 명이 탈 정도의 작은 공간만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연구자의 가슴께를 주먹으로 툭 치며 말했다.

 

“860년 전의 이주선 N0-10v2의 사고 확률은 0.0000001%였다고 하지. 0.0000001%를 뚫고 사고가 일어나 모든 탑승객이 사망했고. 그에 비하면 사건 지평선의 생존 확률은 웃음만 나올 정도야.”

 

연구자는 착잡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복원된 지 겨우 1년 된 과거의 인간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연구자는 새삼스럽게 그녀가 생명체임을 깨달았다.

 

“네가 이렇게 맘 붙이고 못 살아갈 줄 알았으면 차라리 복원하지 않는 거였어.”

“난 고마운데. 진심이야. 그 덕에 이렇게 하고 싶은 게 생겼잖아.”

 

연구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이렇게 겁도 없는 과거인이라면 사건 지평선쯤이야 가뿐히 넘겠지. 이미 한 번 해본 시간 여행을 두 번 못 하겠냐. …그런데, 그건 대체 왜 챙기는 거야?”

 

연구자의 말에 그녀가 손에 쥔 물건을 바라보았다.

 

“그 사람 입장에선 나와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놀랄 것 아냐. 잘 지내자는 의미에서 선물이라도 가져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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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9년 5월 17일 0시 02분 19초

 

블랙홀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녀는 기꺼이 864년 전 밟지 못했던 그림자를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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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5일 16시 3분 02초

 

사람은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 우주는 넓고 완전한 소멸은 존재하지 않으니 결국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잡을 수 없어도 우리는 우주라는 거대한 방에서 함께하는 거라고.

하지만 그런 건 싫어.

내 표정을 네게 보여주고 싶어. 네 손을 잡고 싶어. 대화를 나누고 함께 잠에 들고 싶어. 온 우주가 아닌 네 옆에 있고 싶어.

오래된 팝송 가사처럼 네 머리카락에 꽃을 꽂아주고 포옹하며 사랑한다고 말할래. 그리고 원래 가려던 신행성에서 기쁘게 춤을 추고 즐거워하는 거야.

 

멀리 사라져가는 구호선을 바라봤다.

이제 그녀는 신행성으로 갈 수 없다. 꽃 한 송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옆에 갈 수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놀라게 해준다고 내 다이아몬드만 만들지 말고 네 것도 만들걸 그랬어.

 

그녀는 허전한 목덜미를 더듬고 녹아내리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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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일 23시 05분 59초

 

격벽이 열렸다. 그녀가 그에게 열 송이 장미 다발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이를 만날 때 꽃을 건네며 반겨주었다고, 이 시대의 노래가 말해줬어. 네가 꽃을 가지고 있진 않을 것 같아서 내가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어?”

 

그녀의 손이 긴장 때문에 잘게 떨릴 때마다 장미 꽃잎이 흔들렸다.

꽃잎이 떨림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 순간 그가 격벽의 그림자를 밟았다. 그녀를 끌어안았다.

줄곧 그의 마지막 기억 속에 남아있던 그녀는 덤덤하게 녹아내린 얼굴로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별은 드라마나 영화, 소설처럼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별에 대한 아무런 준비 없이 그는 이 우주에 혼자 남겨졌고 서서히 죽어갔다. 언젠가 구호선 안의 먼지가 되어 로봇 청소기에 빨려 들어갈 때를 기다리며.

그날 끝내 넘지 못한 그림자는 그에게 평생 남을 악몽으로 남았다.

그의 품에 안긴 그녀가 머리에 장미를 꽂아주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뭐라고 불렀지?”

“리데, 프리데리카…. 난 당신을 그렇게 불렀어요.”

“그러면. 나는 당신을 어떻게 불렀지?”

“테이. 노아 테이트 이든. 그게 내 이름이에요….”

 

프리데리카가 그를 힘껏 끌어안은 채 말했다.

 

“다시 만나서 기뻐. 테이.”

 

꾹꾹 참아오던 슬픔이 끝내 터졌다. 노아의 눈에서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그림자가 시곗바늘처럼 흘러갔다.

다시는 건널 수 없었던 그림자를 건너서. 다시는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을 끌어안았다.

 

-

 

라디오와 드라마 속 여자 주인공이 중얼거린다.

 

For those who come to San Francisco

Be sure to wear

Some flowers in your hair

 

“우리에게 남은 기적은 이제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그리고 그 기적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고요.”

 

If you come to San Francisco

Summer time will be a love-in there

 

“그러니 후회 없이 사랑해요. 서로를 만나지 못하고 죽었을지 모를 모든 우주의 우리를 위해서. 오늘이 되기까지 스쳐 지나간, 당신을 만나지 못했던 모든 시간을 위해서라도….”

 

“처음 보는 낯선 이가 당신에게 꽃 한 송이를 건네는, 그런 기적이 당신에게 일어나길 바랍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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