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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도망가기 바빴던 학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휴머노이드의 메모리나 시스템에 관한 부분을 공부해 보고 싶단 이유였다. 둘째의 늦은 학업 열풍에 부모는 금방 그만두겠거니 했지만 결국 상급 학교에 진학이 결정되면서 철이 들었다며 칭찬했다. 플록스는 그 과정에서 훌륭한 선생 역할을 했다. 공부가 막혀 잘 안될 때면 스트레스를 풀어주거나 재밌는 일화를 들려주면서 끝까지 노력해 볼 수 있게 형처럼 격려했다. 진학이 결정된 후 신입생은 교내에 개인 휴머노이드를 가져올 수 없어 잠시 이별의 시간을 가졌다. 제스터는 같이 가지 못하는 게 학교의 부당한 처우라며 인간 취급을 해주지 않을 거면 자기 노력의 산물로 쳐서 반입시켜 주는 게 맞지 않느냐 열변을 토했으나 플록스는 피곤한 얼굴로 제스터의 입을 막았다. 며칠이고 같은 이야기를 듣다 보면 피로하기 마련이다. 자신만 아쉬운 거냐며 제스터는 툴툴거렸으나 플록스는 혼자서도 사고치지 말고 잘 해야 한다며 격려했다. 자신이 사고만 치겠냐며 당당히 대꾸한 제스터는 곧잘 사고를 쳐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연락했다. 그건 부모의 귀에 들어갈 일이 없었는데, 부모의 연락망을 적어야 하는 부분에 수리한 통신 기기를 개통해 플록스에게 주고 간 탓이었다. 그 덕에 매번 골머리를 앓는 건 플록스의 몫이었다.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그중 제스터와 함께 사고를 치고 다니는 괴짜가 몇 있는 모양이었다. 또래 친구도 사귈 줄 알고 마을에서보다 잘 지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 자신의 옷차림이 괜찮냐는 사진이 자주 오거나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로 시작하는 핑계와 함께 그 사람이 좋아할 만한 걸 함께 고찰하길 원하는 고민 상담이 왔다. 사람마다 매력을 느끼는 부분이 다르지만 단 한 가지는 좋아하는 티를 숨기려 상대를 괴롭히진 말라고 조언했다. 부담스럽게 하지 말라는 말도 해야 하나 싶었으나 쭈뼛거리느라 말도 못 걸지 않으면 다행이다 싶어 그 말은 삼갔다. 학년이 올라 개인용 휴머노이드를 지참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제스터가 내내 신경 쓰던 아이도 만날 수 있었다. 자신에게 당당하고 하는 일을 좋아하는 반짝이는 아이였다. 휴머노이드와 인간을 구분하기 위해 뺨에 표시되는 문양을 보고도 자신의 형이라 소개한 제스터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 괴짜 중 하나였다. 플록스는 둘의 연애를 응원했다.

 

가끔 그 생각을 철회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괴짜와 괴짜의 만남은 사고더라.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지 않을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온갖 사고를 치고 다녔다. 제니는 개인 휴머노이드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에 자동으로 둘의 뒤처리는 플록스의 몫이었다. 사고를 치고 난 후 잠시만 눈치를 보는 모습까지 닮은 걸 보니 화도 못 내고 매번 지고 들어가기 일쑤였다. 그것마저도 좋았다.

 

둘은 6월에 식을 올렸다. 날짜를 선정하는 데 있어 널널해서 원하는 날짜에 식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이유를 묻자 둘이 시선을 마주하고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듣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빠르게 말을 내뱉는 플록스의 귓가로 플록스는 6월에 개화를 시작한대. 밝은 톤으로 제니가 재잘거린다. 형 눈이랑 색이 같은 꽃이야. 제스터가 덧붙인다. 플록스는 그 뒤로 별다른 말을 못 했다. 둘은 그 이유를 안다는 듯 웃기만 했다.

 

날이 좋았다. 그 어떤 날처럼 하늘이 맑게 갠 날이었다. 모두가 이 결혼식을 하늘도 축복하는 것이라 입을 모았다. 가족이 앉는 자리에 플록스는 앉을 수 없었다. 사람은 사회의 시선을 신경 쓰고 사는 것이 맞다. 억지를 부리려는 제스터를 제니와 플록스가 막았다. 제니는 이럴 때 확실한 편이라 다행이었다. 대신 축사를 읊는 친구 역할로 둘 다 플록스를 골랐다. 플록스는 사양하려 했으나 둘의 고집을 이길 순 없었다. 입을 일 없는 정장을 차려입은 플록스는 새삼스러운 감상이었다. 편한 복장을 추구하는 둘이 이렇게 꾸미는 일을 볼 일이 드문 탓이다. 면사포를 드리운 순백의 신부와 머리를 넘긴 정장의 신랑이라. 동시 입장을 선택한 탓에 제니의 아버지는 서운한 모양이지만 둘이 손을 잡고 주례사의 앞까지 도달하는 광경은 아름다웠다. 서로에게 맹세의 서약을 하고 결속의 반지를 끼우고 입을 맞추는 일까지. 푸른 눈과 시선이 맞는다. 플록스는 진심을 다해 미소지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신혼여행을 같이 가자는 말에 전력으로 도망칠 때까지는 말이다. 다행히도 둘은 이번엔 고집을 꺾고 찾는데 집중하지 않았다.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다. 후에 플록스는 여행에서 돌아온 둘을 마중나갔다. 까맣게 타고 와서 한참 웃었다.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였을 것 같은 이가 어느새 닮은 아이를 낳는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둘의 모습을 반반 잘 빼닮은 아기가 칭얼거리며 다가온 손가락을 꽉 쥔다. 엘레노어, 넬리. 플록스는 속삭인다. 자신의 이름을 알아듣는 건지 잠시 조용해진다. 둘 다 기이할 정도로 작명 실력이 없었기에 듣다 못 한 플록스가 지어준 이름이었다. 지을 자신이 없으면 평범한 이름이라도 붙여주면 될 텐데 이상하게 독특한 것에 집착했다. 자신이 지은 것도 흔한 이름임에도 둘은 이상하게 순순히 납득했다. 플록스는 약간의 의심을 했으나 다시 시작된 이상한 이름 논쟁에 생각을 더할 틈이 없었다. 제스터와 제니는 애칭을 곧잘 불렀는데 플록스는 나중에 아이가 자신의 이름을 모를 수 있다며 꿋꿋하게 이름과 애칭을 함께 불렀다. 반짝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빛과 다를 바 없었다. 일이 바쁜 두 사람을 대신해 플록스는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길었고 그 탓에 제스터가 아니라 플록스를 보고 아빠라고 외친 넬리 덕에 한바탕 집이 뒤집어진 건 후의 이야기다. 아빠가 아니라는 해명을 받아들인 넬리가 그럼 엄마? 라고 했을 때 한 번 더 뒤집어진 것도.

 

넬리는 잘 자랐다. 자라면서 엄마를 더 빼닮은 덕에 미인 소리를 곧잘 들었다. 학교에서는 퀸카라고 불린다던가. 가끔 정신이 혼미해지는 이야기를 곧잘 하는 덕에 플록스는 애를 먹었으나 제스터와 제니는 자신들의 아이이니 이 모든 게 응당 당연하단 태도였다. 가끔 이 집안에서 도망치고 싶어, 진심 어린 플록스의 말을 셋 다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그쯤 플록스의 낡은 부품이 하나둘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생산이 중단된 터라 중고 부품을 구하는 것도 일이었다. 제스터와 제니는 일에 더 몰두했다. 제스터는 이 분야에 이름을 더 알리면 인맥이 늘 테고 그 길로 중고 부품을 구할 수 있지 않느냐가 중점이었고, 제니는 모든 건 권력의 힘이라며 더 높은 직급에 올라가 직접 생산하게 만들면 된다는 게 중점이었다. 넬리는 그 일로 부모가 더 바빠졌음에도 하루빨리 삼촌을 고치라며 난리였다. 플록스는 이 일의 구심점이 된 것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우면서도 만류하지는 못했다. 가족이 그렇지 않은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고 함께 하고 싶은 건 당연했다.

 

어찌저찌 플록스는 잔고장을 일으키면서도 눈을 감지 않았다. 인간으로 치면 노년이라 치부하면서도 다음 번에는 눈을 못 뜨게 될 수도 있겠다는 걸 받아들였다. 다행인 건 넬리의 결혼식은 보고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넬리의 결혼식에선 플록스도 가족이 앉는 자리에 앉았다. 제스터와 제니의 옆에 앉아서 지켜볼 수 있었다. 웃기 바빴던 부모와는 다르게 넬리는 결혼식의 끝에서 펑펑 울었다. 덕분에 제스터와 제니의 눈가도 붉어진 건 덤이다. 넬리의 동반자도 울어버린 탓에 넷을 달래느라 진땀을 뺀 건 플록스의 몫이었다. 어쩐지 이 집안은 항상 이렇게 돌아가는 것 같아 달래다가 웃어버려 곤경에 처할 뻔했지만. 넬리의 신혼여행은 온 가족의 여행이 되어버렸다. 가서는 서로 따로 지내긴 했지만 같이 야시장을 가거나 식사를 함께했다. 제스터와 제니도 오랜만에 여행에 즐거운 모양이었다. 웃고 있는 둘의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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