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점검을 무사히 완료하였습니다. 겉옷과 소지품을 챙겨주시고, 1층 의약품 센터에서 넘버 코드 제시 후 안정제를 처방 받아 가시길 바랍니다. 4차 점검 일은…]
결국 두 달 뒤에 다시 오라는 단조로운 기계음을 뒤로 하고 시계를 보았다. 상담 시간이 좀 길어진다고 느꼈건만, 예상했던 것보다 이른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기 점검은 귀한 피험체에게 내려진 휴일이었으니 이대로 집에 가서 휴식을 즐기면 될 것이었다. 옷을 챙겨입으며 생각했다. 가는 길에 뭐라도 사 갈까…. 파이에 어울릴 만한 게 뭐가 있었지?
그리고 정지. 머리통에서 느껴지는 이물감_그렇게밖에 표현이 안 된다_에 미간을 구겼다. 사고의 흐름이 생소했다. 점검 후 기억이 자극받는 것은 야기된 부작용이었고 그러니 새삼스레 당황할 것도 없었다. 현기증은 짧았고 불쾌감도 잠시였다. 결국은 잠이나 자야겠다며 사고를 갈무리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걸음을 옮기자, 문이 열리며 고저 없는 목소리가 배웅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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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븐필드(Heaven Field). 222년 전, 지름 약 7km 크기의 소행성이 유라시아 대륙과 충돌하면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류가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아메리카 대륙을 기반으로 재건한 단일 국가. 당시 인류의 문명과 생활 수준을 재앙 이전으로 되돌린다는 명목하에 기술력과 지식을 보유한 공학자와 기술자들이 재건의 중심이 되었다. 그와 별개로 인류 92퍼센트가 소실된 세계는 무질서했고 본디 꼬리 된 자들이 머리가 되려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해결책은 강대한 무력이었다. 군부를 중심으로 권력이 결집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무법자들의 숙청이었다. 공공의 삶을 침범하고 인류의 평화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중앙 정부는 좌시하지 않았다. 죽음을 경험한 인류는 생존에 집착했다. 충돌은 많은 것을 바꾸었고 당시의 생태계는 자연을 착취해 누리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던 인간들이 살아가기엔 열악했다.
공학자와 지식인들은 연구 끝에 인공 돔 건설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재건 과정에서의 인력 소모를 막기 위해 안전성과 도덕성 등의 문제로 시들하던 트랜스 휴머니즘이 활발하게 대두되었고 연합정부가 재건 이후의 부와 권력을 보장하자 젊고 열정 넘치는 지원자들 수십에서 수백 명이 수술대 위에 올랐다. 팔이나 다리, 눈처럼 비교적 교체가 쉬운 부위부터 인공 뇌나 심장을 넘어 신체 전부를 교체하는 이들도 존재했는데 불행하게도 실험이 전부 성공적으로 끝난 건 아니었다. 실험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은 어떤 태생적인 결함에 있었다.
기계와 신체를 정교하게 연결하는 과정 속에서 태생적 결함을 가진 이들의 신체는 빠르면 1개월 안에 괴사했고 인간의 것보다 뛰어나게 작동하도록 설계된 기계 신체도 결함 앞에서는 무용했다. 손실을 줄이기 위해 연합정부는 결함을 수치화했고 기계화에 보다 적합한 이들, 다시 말해 ‘싱크로율이 높은 이들’을 선별해 재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발달된 두뇌와 쉽게 망가지지 않는 신체를 지닌 정예부대는 신인류나 다름없었다. 지구를 복원하는 대신 조금 더 쉽고 빠른 길을 택한 인류는 수년에 걸쳐 오염된 공기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인공 돔을 건축했고 산소와 이산화탄소 농도/태양을 비롯한 재앙 이전의 환경을 거의 완벽하게 복제해 냈다. ‘재건’은 지구를 빼앗기고도 인간만의 지식과 힘으로 기존의 것과 유사한ㅡ어쩌면 더 뛰어난 수준의 환경을 재생산했다는 점에서 인류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평가받았다.
재건 초기의 혼란을 잠재우고 화합을 도모하자는 의미에서 연합정부는 단일화되었고 아메리카 대륙의 거대한 인공 돔 자체를 하나의 단일 국가, ‘헤븐필드’로 명명한 뒤 여덟 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했다. 각지의 생존자들이 모인 만큼 초기 헤븐필드의 목적은 융화였고 언어통합의 필요성을 모두가 간절히 느끼고 있었으므로 칩 형태의 뇌 기능 보조 장치가 가장 먼저 배부되었다. 단일 국가 출범 당시만 해도 인류는 재건의 성공에 도취되어 있었고 원활한 소통과 교류를 배경으로 마침내 재앙을 이겨내고 신인류로 재탄생했다는 기쁨에 눈이 먼 상태였다. 오히려 재앙과 죽음이 가까이 존재할 때 인류는 긴밀하고 끈끈했다. 안주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장점인 동시에 맹점이다. 평화가 찾아오고 사람들이 한숨을 돌리는 사이 헤븐필드를 도맡아 재건한 정예부대를 중심으로 권력자와 지식인들이 결집했다. 그들은 더 큰 풍요와 안정을 열망했다. 가능성과 비전이 존재하는데 나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중심구인 1구역에 정부에서 운영하는 기계 생물학 연구소 HRIM(Heavenfield Research Institute of Mechanobiology)이 세워졌고 ‘인류 강화’는 가파르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그 대가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수술 이후 회복 비용과 일자리까지 나서서 지원했다. 부자와 거지, 노인과 어린아이, 정치인과 운동가⋯. 성격과 인종과 지금껏 살아온 삶이 다른 수많은 사람이 HRIM의 문턱을 밟았다. 재건 과정에서 설립된 정부 기관의 요직에는 신체 일부/혹은 전체를 활동에 적합하게 개조한 ‘신인류’를 우선하여 기용했다. 인공 뇌를 장착한 연구원들의 눈부신 성과로 기계 생물학은 계속해서 발전했고 신인류는 그에 맞춰 신체를 갈아 끼웠다. 신인류에게 한계란 없었다. 소행성 충돌 후의 200년은 그 이전의 문명 성장률을 기하급수적인 배수로 상회했다. 혹자는 대충돌이 인류 발전을 위한 가지치기였다고도 표현했다.
지금에 이르러, 그 대단한 기회 취급을 받던 기계화 시술도 시간이 지난 후엔 그저 당연한 일이 되었다. 막대한 부와 권력을 축적한 재건 초기의 지식인이나 정치인들이 가장 높은 계급을 차지했다. 효율을 목적으로 하는 시술보단 천문학적인 비용을 요하는 미용 목적의 시술이나 수명 관련 시술이 유행처럼 번졌고 덕분에 외관으로 나이를 판별하는 게 어려워졌다. 그리하여… 공학이 인가하는 세계 아래 ‘신인류’는 다시없을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헤븐필드 1구역 드로스트 구 23번지 이하 주소 생략… 팬시 파이(Fancy Pie) 전문점. 그 앞에 선 남자가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시몬 첼스턴으로, 대략 반년 전 뇌 수술을 받은 관계로 오늘 1구역에서 정기 점검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것도 후유증? 아님 징크스.
그가 약을 상자째로 주문한 게 어제였다. 6구역도 아니고 아마 지금쯤이면 도착해서 현관문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이 무색하게도 그가 걸음을 멈춘 것은 빨간 간판으로 도배된 파이 가게는 지나치게 시선을 끄는 편이었고 그 의도대로 시몬의 눈에 들어왔으며, 마침 그의 뇌에선 파이를 먹으라는 계시를 받은 참이었다. 또한 그것을 무시하기엔 오늘의 시몬 첼스턴이 드물게 한가했다는 것도 한몫했다. 식사를 약_단 한 알에 탄단지 기타 등등 일일 영양 권장 섭취량 충족. 최대 4회까지 복용 가능하며 그 이상 먹으면 살찔 수도 있음_으로 대체하는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으나 점검을 받고 나면 꼭 파이가 당기는 기묘한 징크스가 생겨버린 참이었다.
푸드점에 자의로 들어온 게 몇 년 만인지 가늠하며 발을 들이자 깔끔한 단내가 그를 맞이했다. 사람 없이 자동화된 흔한 풍경의 프랜차이즈 가게 안은 주문하고 있는 사람 한둘을 제외하면 한적했다. 평일 오전은 이래서 좋다는 생각을 하며 주문기 앞에 서서 메뉴를 고르고 있자니 어디선가 그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봤으나 누구도 이쪽을 보는 사람은 없었기에 이상함을 느낄 무렵, 시선을 내리자 금방 원인과 눈이 마주칠 수 있었다. 때아닌 감시자는 나이를 다섯 손가락 안으로 셀 수는 있을까 생각이 드는 작은 아이였다. 앞니는 빠졌으나 젖살은 빠지지 않은 아이는 제 오동통한 손으로 부모의 손을 꼬옥 잡으며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시선을 돌리는 대신 아이와의 소리 없는 공방전을 선택했다. 곧 우물대는 아이의 볼 속에 무엇이 들었나 하는 잡생각이 들 때쯤, 그의 등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애기들 볼살을 뭐라 부르는 줄 알아?]
[젖살.]
[땡. 귀여움 주머니. 일일 귀여움량 다 채우고 남으면 담아두는 용이야. 잘못해서 터지면 사람들 다 쓰러져. 무섭지.]
남자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방금 생각해 낸 거야?]
[한 4년 전쯤.]
[넌 진짜 인생이 심심하지가 않겠네….]
[빵빵해서 귀엽잖아. 어떻게 저렇게 예쁘지. 하나 같이.]
[그야 유전자 조작을 했으니까.]
[….]
이번엔 여자가 말이 없었다.
[한 번 유행 돌면 그 시대 신생아들 다 똑같이 생겼어.]
[…너 진짜 짜증나는 거 알지?]
[어. 저번에도 말해줬어, 네가.]
어처구니없는 대화의 흐름에 우습기도 잠시, 기시감이 느껴져 뒤를 돌아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을 때 그곳에 시답잖은 만담을 주고받는 남녀 따위는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시몬 첼스턴은 의문을 갖는 것 다신 다시 고개를 돌려 파이를 주문하기를 선택했다. 뇌 한 구석에선 어딘가 들어본 적 있을 노래 하나를 재생시켰다. 기억 속의 드러머가 둥둥둥- 박자를 치자 그의 두통도 둥둥둥- 울렸다. 모르는 가사는 쿨하게 넘기고 아는 멜로디만 콧노래로 작게 흥얼거리며 타이밍 좋게 나온 따끈한 파이를 집어들었다. 사과 파이 6조각의 무게는 생각보다 묵직했고 입맛은 없었다.
지금에서야 전원 키고 닫듯이 생각을 끄고 노래나 틀 수 있게 됐지만 반년 전, 그러니까 수술 직후의 시몬 첼스턴은 스스로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체로 시몬 첼스턴의 인생은 거진 매뉴얼에 가까운 계획대로 흘러갔는데, 변수라고 해봐야 생체칩 손실, 백업 전 사망으로 생긴 기억 공백... 등 어쩔 도리 없는 사고 정도로만 존재했다. 그러나 기억 삭제_아마도 3년 그 이상의_라는 조금도 예정에 없었던 이슈로 인해 그는 현재 인생에서 가장 큰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이게 얼마나 즉흥적인 충동으로 결정된 일인지 그가 수술 직후 눈을 뜨자마자 제거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연구자의 말에 처음으로 뱉은 말이 “ ...제가 말입니까?”였다.
귀가 후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리자마자 집에 있는 주인 모를 물건들을 치울 때는 ‘자원이 아니라 설마 강제였나’ 싶을 정도로 허술한 사전 작업에 대해 다시 한 번 수술 동의서를 일독해야 했다. 삭제된 기억에 대해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대체 무엇이 얼마나 제 삶에 침투에 있었던 건지 또한 뭐가 그리 문제여서 기어코 뇌에서까지 몰아낸 것인지 궁금해하지 않을 겨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집안 곳곳에 널린 물건들은 뇌 어딘가를 자극시켰다.
그런 이유로 직감적으로 열어볼 시도조차 않은 방 하나가 있었다. 굳게 닫힌 문을 열어젖히고 안을 확인할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그것 또한 권장사항이 아니었다.
그는 첫 점검 날을 복기했다.
[…쉽게 말하자면 현재 당신의 기억은 암세포를 도려낸 것과 비슷합니다. 관리를 잘못했다간 일부 되살아날 수도 있다는 뜻이죠. 기억도 재발할 수 있다니, 신기하지 않습니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냐고 속으로 항변할 즈음, 이명이 골을 울렸다. 뇌 쪽은 통각 제거가 먹히지 않아 다른 시험체들도 고통을 호소하는 탓에 곤욕을 치렀다는데 그라고 다를 리 없었다. 의식이 반쯤 끊긴 와중에도 옆에서 떠들어대는 소리는 착실히 정보로 주입되어 뇌에 기록됐다.
[당신의 상태는 저희 쪽에서도 꽤나 주목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례를 보면 작게는 다른 부끄러운 기억들이거나 크게는 사고 당시의 기억처럼 단편적인 기억 삭제가 대부분입니다. 정확히 말씀드릴 순 없으나 당신의 사례가 진행됐던 것들 중에 가장 난이도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여러 가지 새로운 수술을 시도할 수 있었죠. 아아, 그렇다고 지금 지워진 기억에 대해 생각하지 마세요. 제 말 듣고 계시죠? 여기 음악 틀어드리겠습니다.]
고상한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연구원은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연구직들은 다 제 할 일만 하는 목석들일 줄 알았는데 이 자는 쓸데없는 사족이 많았다.
[향후 상태를 지켜봐야겠지만 현재로서 수술은 성공적입니다. 기억 접합술도 무사히 마쳤고-부수적인 수술도 마찬가지고- 무엇보다 사고 체계에 큰 문제가 없으니까요. 가끔 나타나는 두통 같은 것도 다 예상 범주 냅니다. 접합한 기억이 뭔지 물론 궁금하시겠죠. 공백기는 기존 삶을 토대로 재구성하여 현재와 봉합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또 중요한 기술이 들어갔는데…]
자신의 지식 설파에 심취한 연구원은 물어보지도 않은 신식 기술에 대해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전에 이러한 상담 형식보다 정보 주입이 더 효율적일 것 같다는 말을 했다가 점검 시간이 1시간이나 추가되었던 관계로 이럴 때는 입을 다무는 것이 상책이었다. 여하튼 요약하자면 취합한 기억 데이터들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기억으로 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요지는 이 기술의 연구가 더욱 진척된다면 본인의 기억을 가진 ‘진짜 사람’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성장기를 거치지 않고 사고력과 지성을 가진 노동 인력을 적재적소에 맞춤 생산해낼 수 있다는 얘기죠. 예를 들자면 우리가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가수가 필요하다고 합시다. 단순히 성대를 울려 좋은 소리를 나게 하는 것이 아닌 노래를 부르는 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감정이 듣는 이들에게까지 느껴지는 ‘인간’ 가수 말이죠. 과거 7구역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어머니와 직접 빨래를 하며 듀엣했던 소녀가 지금 이 순간 1구역의 큰 극장에 오르기까지… 정도의 서사를 가지고 있으면 더욱 금상첨화 입니다. 저는 이걸 단 시간에 이뤄낼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설명해드리고 싶으나, 적잖이 지루해하시는 것 같으니 이건 생략하도록 하죠.]
적당히 눈치를 챙긴 연구원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원하는 결과를 위해 최고의 효율을 뽑아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그걸 진정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는 큰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렇게 탄생한 인격체가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길 지 역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그 기술을 써서 뇌 속 비운 공간을 채운 자가 그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이 이야기를 누군가 듣는다면, 코웃음 칠 것이었다. 아주 놀고들 있네. 꼭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이건 우리 삶의 질, 아니 더 나아가 헤븐필드 구성층의 판도를 뒤집을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억의 괴리가 느껴진다면 깊게 파고들지 말고 사고를 멈추세요. 뭐 방법이야 많습니다. 노래를 듣는다거나 사람과 대화를 한다거나. 주의를 돌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요. 혹여 기억 재발이 일어난다면, 머리 뚜껑을 다시 개봉해야 되니까 이 부분도 염두해 두시고요. 그럼 또 저랑 재수술 시간 내내 대화하셔야 합니다. 하하.]
그러한 권고에도 불고하고 그 후로도 꾸역꾸역 집구석을 정리하던 시몬 첼스턴은 제 업보대로 몇주만에 다시 그를 만나야 했다. 서랍 안에서 편지 하나를 발견했고 펼쳤으며 첫 문단을 읽었다. 그리고 눈을 한 번 감았다 떴을 땐 이미 수술대 위였다. 이것도 부작용 중 하나라며 대수롭지 않은 듯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리자, 자신이 기절했었음을 깨달았다. 이사라도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조언을 끝으로 재수술도 무사히 마쳤다.
알 수 없는 그 존재에 대해 시몬 첼스턴이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제 집에 들여 꽤 오랜 기간 같이 살았고 그 중에서 여러 공간을 내어줄 정도로 친밀했으며, 아마도 끝은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제 인생에서 긁어내기 위해 성공률이 확실치도 않은 임상실험에 기꺼이 자원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지금은 편지의 첫 문장이 무엇으로 시작했는지도 기억하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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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표:8.93-H-22 신 무기 가칭, ‘헬레네’ 소재 파악 및 정보 수집]
통신기에 신호가 잡혔다. 상부 쪽 회선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개시 될 작전에 대한 지시가 간략하게 전달 됐다. 작전 분류는 ‘트로이 목마’로, 잠입 작전이었다. 집결 지점은 8구역 외곽에 위치하는 촌락이었다. 도시에서 왔다고 광고할 필요는 없었으니 전용기는 어림도 없었다. ‘청소’ 외에는, 도시 밖 구역에선 중간중간 이동 수단을 바꿔가며 접선지로 각자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촌락에서 도시의 의미는 그리 좋게 통하지 못 했다. 이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나 구태어 언급하지 않는 이야기다.
헤븐필드의 수뇌부는 군사력과 공학 기술을 기반으로 이 문명을 이룩해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태생적으로 선택 받은 자들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자랑스럽게 일컬어지는 인류 강화 프로젝트는 모두가 평등하게 같은 위치에 설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는 누구에게나 기회를 제공하는 것마냥 굴었지만 ‘싱크로율’이 낮은 이들은 시도하기도 앞서 신체에 기계를 달고 신인류로 재탄생할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다. 격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발생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 한들 기계화를 거치지 않은 인간은 어느 순간에는 반드시 한계에 부딪혔다. 싱크로율이 낮은 일반인들은 신인류가 맡기엔 인력 낭비라고 판단되는 다소 ‘하찮은’ 일자리에 배치되었고 또 어느 순간엔 단순노동을 목적으로 개발된 인공지능 로봇에게 그 자리를 빼앗겼다.
그러한 헤븐필드의 시스템에 인류 ‘전체’는 완벽하게 적응했고 권력관계와 계급은 고착화되었다. HRIM은 ‘유전자 선별 기술(GST)’을 전면에 내세웠고 1세대 신인류는 비용을 들여 자식의 유전자에서 결함을 제거했다. 그렇게 태어난 ‘결함 없는’ 아이들은 1구역부터 6구역까지의 도시마다 세워진 아카데미에 입학해 기초교육을 비롯한 각종 교육을 받았다. 반면 기계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혹은 기계화를 선택하지 않은 인류는 헤븐필드 외곽으로 밀려났다. 기반이 없는 이들은 촌락을 이뤄 인근 도시에서 구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며 살아갔고 싱크로율이 낮은 사람들을 위해 불법적인 시술을 진행하는 의료소도 생겨났다.
재건 초기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던 정부가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설 때부터 싱크로율이 낮아 기계화를 거치지 못한 사람들은 7구역을 중심으로 뭉쳐 제 7구역 시민연대를 설립했다. 시민연대의 활동을 반사회적 행태라 명명하고 대화와 소통 대신 압제를 택한 정부는 도시의 신인류와 시비가 붙어 유혈사태가 일자 해당 사태를 명목으로 당시 시위의 중심에 있었던 주요인물 다섯 명 가량을 사살했고 결국 단체는 쉽게 와해되었다. 단체에 소속되었던 이들의 이름은 정부 시스템에 기록되었고 아르바이트 자리조차 얻을 수 없어 거리를 전전했다. 작금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희생자가 반드시 필요했고 그때부터 시민들은 정부의 폭력을 묵인하기 시작했다. 모든 일자리가 기계화를 거친 중산층으로 대체되고 1-6구역과 7-8구역이 암묵적으로 분리되며 헤븐필드는 겉으로나마 완벽한 국가로 거듭났다.
그렇게 소외된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7-8구역에 자리 잡은 ‘촌락’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조차도 도시인들 기준으로 불리우는 멸칭에 가까웠다. 그러한 촌락에서 도시에서 왔다고 공공연하게 티내며 다니는 것은…
“자살 행위다. 소형 통신기를 제외한 기기는 사전에 자체적으로 말소하도록.”
이번 임무에 배정된 요원은 α(알파) 소속 1명, β(베타) 소속 3명, γ(감마) 소속 1명이었다. 과거에는 고정된 팀으로 임무를 진행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개혁된 이후로는 부대원들은 배정 받는 임무마다 소속원이 달라졌다. 이름 대신, 요원명으로 원칙적으론 사적인 대화 및 만남은 지양되어야 했다.
“‘더미’에게 신분이 발각되어도 마찬가지다. 칩 말소를 우선으로 한다. 행동 불가 시, ‘찰스’ 판단 하에 원격 말소를 진행한다.”
개혁의 계기가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과거 고정된 부대원 열댓명이 그대로 손 잡고 탈영한 사건이었다. 탈영 사유는 불문에 붙였으나, 이후 본부는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부대 체제를 개편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사건의 원인은 부대원들 간의 지나친 유대감이었기에. 그래봤자 임무 성공률이 높았던 팀은 재배정 확률도 역시 높아졌으니 큰 의미는 없다고들 하나… 중요한 것은 표면적인 상징이었다. 익숙할 지언정 하나로 묶이지 않았다는 거리감은 서로를 어디에나 뽑아쓰일 부품으로 존재하게 했다. 이로써 위대한 헤븐필드는 최대의 효율을 뽑은 셈이었다.
“명령어 [카카오 파이], 이후 오더 권한은 ‘벤처’에게 넘어간다. 우선 명령은 변함 없다.”
이번 임무의 그 사건과 같은 방식으로 심은 첩자와 접촉하는 것. 요원명, [카산드라]. 반군이 가진 신 무기에 대한 정보를 일부 탈취해 본부에 전달해 왔던 자였다. 추적을 피해 칩 이식으로 주기적으로 신체를 바꾸고 있어 현재 전달 받은 외형 정보는 무용했다. 통신을 끊으려는 찰나, 무전기에서 수신이 들어왔다.
“말해.”
[여긴 ‘포크스’. ‘벤처’가 행동 불능 시엔 누구에게 넘어갑니까.]
“‘파리하’에게 넘어간다.”
[여긴 ‘포크스’, 다음은요.]
“‘포크스’가 거기서 더 덜떨어진 질문을 한다면 ‘레예스’한테 넘어가겠지.”
[여긴 ‘포크스’, 알겠습니다.]
이제야 잠잠해진 무전기를 끄고 로브를 뒤집어쓴 자는 ‘촌락’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좁은 골목길들은 이리저리 얽혀 있었고, 양옆으로는 크고 작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은 낡았으나, 생활감이 가득했다. 벽들은 낙서와 광고지로 뒤덮였고, 간판들은 여기저기 깜박이는 형광등 아래에서 혼란스럽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형광등이 비추지 않는 쓰레기 더미에 파쇄한 기기들을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처분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팔이 4개 정도는 심심잖게 보이는 불법 개조자들, 안전 기준법을 단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할 것 같이 생긴 벽을 타고 달리는 바이크. 노점상들이 골목 곳곳에 자리를 잡고 각종 물건들을 팔고 있었는데, 신선하지는 않지만 저렴한 과일, 즉석에서 조리된 음식, 허름한 가전제품 등이 그들의 주된 상품이었다. 상인들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고, 바닥에는 쓰레기가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어 도시의 규율과는 거리가 멀었다. 1-6구역 인구 수의 6배를 차지하는 이들이 있는 이 곳은 번잡했으나, 그게 곧 그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활기였다. 그러고보니 이맘쯤에 이곳에서만 존재하는 축제가 있다고 들었던 기억이 있다. 출처는 가물가물하지만.
당최 단속이 필요 없는 인간을 찾는 게 더 빠르겠군. 도시와는 대비되는 풍경에 이유 모를 향수병까지 생길 지경이었다. 좌표가 가리키는 곳은 이 곳이 맞았으나, 의문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번화가라는 것. 근처 호프집에 갓난 자리를 잡고 부자연스러운 곳은 없는지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으나, 그 시도가 무색하게도 이곳은 그저 이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로만 가득했다. 정말이지 진정한 신 무기는 물량 공세라고 말해도 믿을 수 있을만큼 인간들이 넘쳐났다. 지하 벙커라도 있는 건가 생각할 무렵, 건너편 비어있던 자리에 누군가 걸터앉으며 시선을 끌듯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렇게 뒤집어 쓰고 있으면 안 더워?”
그 순간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하나 더 깨달았다. 도대체 언제 봤다고 모두가 서로를 어제 만난 친구처럼 대하는 건지. 경계 대신 이미 일행이 있다며 대꾸하려던 찰나였다. 그렇게 눈에 닿은 상대의 얼굴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24시간 쉴새없이 머리 한 구석에서 돌아가고 있는 최악의 전개 시뮬레이션이 일순간 멈출 정도로. 본디 인간이란 어찌 생긴 것인지 당최 알 수 없게 하는 이곳의 개조자들의 외형에 비하면 앞의 여자는 오히려 일반적인 미형의 ‘사람’에 가까웠다. 오히려 그 점이 이질적이었다. 지금 귓전에 울리는 게 이명인지 경보음인지 일순 분간이 어려웠다. 본능적인 경계심이 앞선 그의 손이 무기에 닿기 직전,
“아아, 맞다. [예언자의 무기는?]”
성큼 테이블 너머로 상체를 드밀어 다가온 여자의 입에서 나온 건, 뜻밖에도 첩보원과 공유하는 암구호였다. 당혹감이 여실히 드러나는 기색을 감지한 건지 혹은 그걸 의도한 건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한 반응이었다. 양쪽의 색이 미묘하게 다른 눈이 슬며시 가늘어지며 웃음 지었다. 대답이 없네…. 너무 오랜만인가. 여자의 혼잣말은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묻혔다.
“데리러 왔어.”
